▲ 소나무숲 우거진 금선계곡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맨위). ‘마실’을 다녀오는 무섬마을의 한 노인(왼쪽). 오른쪽은 무섬마을 전통 한옥과 초가. | ||
무섬마을은 전형적인 ‘물돌이마을’이다. 삼면이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멀리서 보면 수도꼭지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지려는 물방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수도리’(水島里)라고도 부르는데, ‘무섬’은 그 뜻 그대로를 옮긴 것이다.
안동 하회와 예천 회룡포의 특징을 반반씩 섞어 놓은 곳이 바로 영주의 무섬마을이다. 마을의 규모로 따졌을 때 회룡포와 비슷하고, 그 내부 가옥이나 마을의 구성은 하회와 흡사하다.
무섬마을에는 총 48채의 가옥이 있다. 이 가운데 무려 16동이 100년 넘은 고택이다.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수도교 위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한옥과 초가가 어깨를 맞대며 어우러져 있다. 마치 하나의 민속촌을 보는 듯하지만 여느 민속촌과 다른 점이 있다면 50여 명의 주민들이 여전히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타까운 것은 주민 대부분이 60대 이상의 고령이고 점점 그 인구도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빈집도 차츰 늘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16채의 집에 사람의 온기가 없다.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의 집성촌이다. 먼저 17세기 중반 박씨 가문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다가 18세기 중반에 증손녀사위인 김씨를 불러들였다.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앞으로는 내성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버티고 있다. 물에 갇혀 있는 형국이지만 예부터 이 마을은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부자마을로 유명했다. 한창 때는 농토가 마을 밖 30리까지 미쳤다고 전한다.
이 조그마한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고 ‘아도서숙’이란 글방을 건립해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아도서숙을 건립에 주축이 된 독립운동가 김성규는 시인 조지훈의 장인이다. 조지훈은 고향이 영양 주실마을이지만 무섬마을로 장가를 왔다. 그는 이 마을을 그리며 ‘별리’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지금이야 수도교가 마을로 편안히 이끌어주지만 예전에는 마을을 드나들기 위해선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방죽을 따라 돌다보면 외나무다리가 처량하게 놓여 있다. 외나무다리 건너기 등의 체험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이 다리의 원래 자리를 찾자면 수도교가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 사실 무섬마을이 세상과 통하는 길은 수도교 외에도 하나가 더 있다. 수도교를 건넌 후 왼쪽으로 방죽을 따라 가면 무섬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2005년 준공된 다리다.
▲ 무섬마을 앞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1989년 수도교라는 돌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 ||
여하튼 무섬마을은 고택답사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해우당고택, 만죽재, 김뢰진가옥, 안동장씨종택 등 민속자료로 지정된 집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의 고택은 건물의 보존 상태도 상당히 양호하다. 이 고택의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만죽재고택은 마을에 들어온 시조 격인 박수 선생의 집으로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무려 1666년에 건립되었다.
무섬마을에서는 ‘까치구멍집’도 꽤 볼 수 있다. 강원도 태백산 주변과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하는 산간벽촌 서민주택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옥형태로 지붕마루 양쪽 아래에 까치가 드나들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점이 다른 가옥과 구별된다.
이제는 길이 잘 닦여 찾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원래 풍기읍 금계리 주변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중엽 이후 민간에 유포된 풍수지리예언서인 <정감록>이 길지로 꼽은 곳으로 속칭 ‘정감록촌’이라고도 불린다. 소백산 영봉인 비로봉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삼가동 저수지가 나오고 그 아래에 금계리가 자리하고 있다.
정감록에는 국가적인 대재앙이 벌어지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곳으로 10곳을 꼽고 있다. 보은의 속리산, 안동의 화산, 남원의 운봉, 부안의 호안, 무주의 무풍, 영월, 예천, 계룡산, 합천의 가야산, 그리고 바로 이곳 금계리다.
금계리에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혼란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왔다. 경북지역 사람들이 거의 70%를 차지하지만 이북과 충청, 강원도에서도 소문을 듣고 하나둘씩 찾아와 정착했다. 주민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버섯과 약초를 따서 생계를 이어갔다. 현재는 80가구 200명 정도가 생활하는데 대부분 인삼농사를 짓는다. 이곳은 풍기에서도 손에 꼽는 인삼재배단지다. 금계리 일대는 해발 250m 이상 지역으로 이곳에서 재배된 인삼은 육질이 단단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