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것이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동네다.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남쪽 바닷가에 자리한 이 마을은 2007년 4월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의 배경으로 입소문을 탔다.격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노장의 이 영화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진목리 출신 작가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화한 것이다.
임권택의 100번째 작품으로 주목받은 천년학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소리꾼 남매 ‘동호’와 ‘송화’의 애틋한 사랑을 다룬다.영화 속에서는 보랏빛 자운영과 푸른 보리가 봄을 노래했지만, 현실의 산저마을은 노란 유채꽃 물결이 일렁인다. 산저마을은 본래 유채를 재배하던 곳이 아니다. 55가구 150여 명이 사는 이 작은 마을은 봄이면 파와 보리농사로 바빴다.
유채는 올해로 3년째다.산저마을의 유채꽃은 <천년학> 촬영지임을 더 멀리 알리기 위한 마을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유채를 심어 볼거리를 제공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시도를 했는데 그게 대성공이다. 경관보존작물 신청을 하고, 3.3㎡(1평)에 1500원씩 지원받기로 군과 계약을 맺었다.
밭농사를 포기하는 대가로는 만족할 수준이 아니다. 그래도 마을사람들은 흐뭇한 모습이다. 쥐 죽은 듯 조용했던 마을이 근 2~3년 사이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채꽃이 유혹하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다. 영화 촬영용으로 세워진 선학동주막이다.
▲ 보물 1254호로 지정된 목조사천왕상. | ||
주막 뒤로는 바다다. 주막은 마을의 제방 위에 세워져 있다. 1965년 간척이 이뤄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닷물은 이 제방을 넘어 산 바로 아래까지 밀려들었다.주막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자 왼쪽의 산허리를 휘감은 유채밭이 자꾸만 손짓한다. 유채밭 군데군데 원두막이 세워져 있다.
어떤 것은 다소 허술하게, 또 어떤 것은 제법 크고 단단하다.마을의 대로 옆으로 유채밭 산책로가 하나둘 나 있다. 층층 계단 같은 다랑이에 유채가 심어졌지만, 오르는 길이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다. 전망대 격인 원두막에 이르러 뒤돌아보면 두 개의 원색이 치열하게 충돌한다.
오른쪽에서는 방조제에 막힌 바다의 푸른 빛깔이 달려들고, 왼쪽에서는 유채의 노란 꽃물이 또한 바다의 푸름을 지우려 덤빈다. 색깔의 전투야 알 바 아니고 다만 눈이 즐겁고 마음이 행복하다.유채꽃만 꽃인가. 할미꽃도 꽃이다.
산저마을을 찾은 길에 한재공원에도 들러보자. 한재공원은 우리나라 최대의 할미꽃 자생지다. 공원은 산저마을에서 약 4㎞ 거리에 있다. 한재는 신덕리와 대리, 신상리에 사는 사람들이 회진과 대덕으로 나들이하던 통로 고개였다.
구불구불 이어진 고갯길을 자동차로 10분쯤 오르면 한재공원에 닿는다.공원은 할미꽃 천지다. 제철은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 지금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꽃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꽃이 떨어진 후의 할미꽃을 보는 것도 나름 멋있기 때문에 한 번쯤 꼭 가볼 만한 곳이다.벨벳장미 같은 짙은 붉은 색의 꽃을 떨구면 할미꽃은 긴 수염을 휘날리기 시작한다. 수염은 햇빛 아래서 마치 비눗방울처럼 반짝거린다.공원에서는 지정된 길로만 다녀야 한다. 아무 곳이나 들어섰다가는 할미꽃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재공원은 전망도 기막힌 곳이다. 할미꽃밭을 가로지르며 큰 봉우리로 오르면 동쪽으로 득량만이 가없이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멀리 산저마을도 눈에 잡힌다.유치면 봉덕리의 가지산 보림사도 빠뜨리지 말자.9세기 중반 신라 경덕왕 때 체징선사가 세운 이 절은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온 선종 종찰이다. 이곳에는 국보 2점을 비롯해 보물 8점, 전남도문화재 15점이 보관돼 있다. 가히 보물상자라고 할 수 있는 보림사는 절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보물이 맞이한다.사천왕문의 사천왕이 그것이다.
2층으로 이루어진 대웅전 뒤편 오른쪽에는 보물 158호 보조선사창성탑비와 조각이 아름다운 보물 157호 보조선사창성탑이 있다. 보물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명부전의 용마루도 그 못지않다. 구름무늬 기와 위에 양쪽으로 용 두 마리가 지붕 꼭대기에 앉아 있다. 도자기로 구워 만들어 올린 것으로 용의 얼굴 표정이 무척 생생하다.
보물을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도 있지만, 보림사에서는 뒤편 비자나무숲길 산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보림사 주변 가지산 일대에는 50~60년 이상 된 비자나무와 녹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보림사 주위로 삼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동부도군에서부터 왼쪽 서부도군 쪽으로 삼림욕길이 나 있다.
30분쯤 걸리는 길로 비자나무와 녹차나무 특유의 쌉싸래한 향기가 정신을 맑게 한다. 대웅보전 뒤편에는 이 숲에서부터 약수가 흘러내리는데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물맛이 좋다.
<여행 안내>
★길잡이: 서해안고속국도 목포IC→2번 국도→순지교차로→우회전→23번 국도→관흥삼거리→좌회전→4번 군도→산저마을(선학동) ★먹거리: 장흥은 요즘 키조개 수확이 한창이다. 키조개는 연근해 수심 20~50m의 뻘모래에 서식하는 조개로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크다. 생긴 것이 알곡과 껍질을 분리해내던 농사도구인 ‘키’를 닮았다고 해서 그 같은 이름이 붙었다. 회, 삼합, 구이, 무침 등 요리법이 다양하다. 키조개마을인 안양면 수문리에 정남진회타운(061-862-6700), 우남정(061-862-1203), 갯마을(061-862-1203) 등 키조개 전문 음식점들이 많다. ★잠자리: 산저마을과 가까운 회진항에 해진모텔(061-867-3360)과 다모아모텔(061-867-5000), 키조개마을 수문리에 옥섬워터파크(061-862-2100)와 해오름펜션(061-862-2288) 등이 묵을 만하다. ★문의: 장흥군청 문화관광포털(http://travel.jangheung.go.kr) 061-860-0224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