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하나의 소품이 되어버린 거전갯벌의 배. 새만금간척사업으로 물길이 막히면서 배는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는다. | ||
누군가는 말한다. ‘참 지루한 곳’이라고. 하지만 또 누군가는 말한다. ‘참 편안한 곳’이라고. 여행지로서 전북 김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개 이렇게 갈린다.
실제 김제에서는 동남부의 모악산을 제외하고 변변한 산을 찾아볼 수가 없다. 높아봐야 50m 미만의 구릉이 전부다. 그 외에는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 그리고 너른 들녘이다. 산과 계곡이 빚어내는 멋진 풍광을 기대했다면 김제여행은 지루한 곳이 맞다. 그러나 광활한 들판 사이로 난 길을 달리며 켜켜이 쌓인 마음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싶다면 이보다 편안하고 매력적인 곳도 드물다.
▲ 벽골제와 관련된 용추의 설화를 바탕으로 재현한 두 마리의 거대한 대나무 용.(맨 위 사진) 약 1700년 전 조성된 농업용 저수지 벽골제.(위에서 두번째 사진) 갯벌체험객을 위한 택시로 이용되던 거전리의 트랙터다. 지금은 갯벌순찰을 돌 때나 한 번씩 운행할 뿐이다.(맨 | ||
먼저 29번 도로를 따라 달리면 부안에서부터 임실로 이어지는 30번 도로를 만나는데, 바로 직전에 그 유명한 벽골제가 있다.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대단위 농경을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다. 벽골제는 신라 흘해왕 21년(330년) 축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용 저수지다. 둘레가 무려 44㎞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저수지였다. 지금도 제방이 포교리에서 월승리까지 3㎞가량 남아 있다. 수문도 볼 수 있다. 벽골제에는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고 불리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다. 그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 있는 수문은 두 개소.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경장거다.
벽골제 일대는 현재 공원으로 변모한 상태다. 농경문화박물관과 우도농악관, 누각과 사당, 야외조각공원 등을 갖추고 있다. 가족의 한나절나들이 공간으로 부족함이 없다. 농경문화박물관에는 벽골제의 발굴경과를 알려주는 자료와 농경 민속유물 524점이 전시돼 있다. 우도농악관에는 김제 농악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공연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농경문화박물관 정면과 우측면에는 단야루와 단야각이 있다. 벽골제를 완공시키기 위해 희생한 단야라는 처녀를 기리는 건물들이다. 단야루 2층 마루는 누구든지 올라가 쉴 수 있도록 개방이 되어 있다. 야외에는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두 마리의 용과 소를 주제로 한 조각공원이 있다.
벽골제 인근에는 아리랑문학관도 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과 항일 독립운동사를 그린 작품이다. 1990년 12월 <한국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해 광복 50주년이 되던 1995년 8월 모두 12권으로 출간되었다. 김제 내촌과 외리마을 사람들이 그 주인공이다.
문학관은 모두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1전시실은 일제의 수탈이 이어지던 김제의 옛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2전시실은 작가의 육필원고와 취재수첩 등이 전시돼 있다. 10년 넘게 걸린 <아리랑>의 집필 과정이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3전시실에서는 작가의 애장품을 볼 수 있다. 가족사진과 자화상, 필기구 등이 있다.
아리랑문학관에서 나와 711번 도로를 이용해 올라가면 드라이브하기 좋은 702번 도로를 만나는데, 도중에 하시모토사무실을 지난다. 죽산면 농토의 반 이상을 차지했던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사무실이다. 1920년대 지어진 사무실은 지금까지도 무너져 내린 곳 없이 말짱하다. 단층 건물로 외벽의 회색과 살굿빛 페인트 빛깔이 약간 바랬을 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로 이용된 이곳은 현재 텅 비어 있다. 이곳을 통해 김제의 넓은 들에서 수확된 어마어마한 양의 벼들이 수탈되고 농민들의 땀방울이 무의미하게 희생되었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이제 들판에서 바다로 눈을 돌려보자. 성덕면 남포삼거리에서 711번 도로를 버리고 702번 도로로 갈아타면 광활면과 진봉면을 한 바퀴 휘도는데 그 중간쯤에 심포마을이 있다. 호젓한 포구와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 칠면초(개펄에서 자라는 야생초)와 붉은 개펄이 있는 곳이다.
심포마을은 위쪽으로 만경강, 아래쪽으로 동진강이 흘러내려 바다와 만나는 지점 한가운데 있다. 오른쪽으로 군산, 왼쪽으로 부안 변산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심포마을 앞바다는 풍요롭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비싼 백합이 쏟아지듯 잡히고, 꽃게와 대하, 도미, 농어 등도 이 바다에 넘치도록 많았다. 작지만 포구에는 배들이 무시로 오갔고, 손님을 맞는 횟집들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개펄에는 풍부한 먹이를 찾아 들어온 도요새 울음으로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옛 모습. 2006년 새만금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서 이 바다의 영광도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신시, 가력 두 곳의 배수갑문을 열고 닫으면서 갇힌 물을 정화한다지만 수질이 이전에 비해 나빠진 탓에 어패류의 어획량이 크게 줄었다.
‘그래도 바다를 버릴 수 없다’며 배를 띄우는 이곳의 풍경을 이제 이야기로나 듣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지난 3월부터 새만금 매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매립이 진행되면 바다를 낀 심포마을은 육지가 된다. 벌써 육지처럼 변한 곳도 있다. 물막이 공사 이후 사막화된 거전갯벌이 그곳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트랙터를 이용한 ‘갯벌택시’를 운영하면서 여행객들을 불러 모았던 곳이다. 갯벌바닥은 이제 완전히 딱딱해진 상태다. 물이 빠져야만 걸어 갈 수 있던 민가섬은 언제라도 통행이 가능해졌고, 조개를 캐는 사람들 대신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먹거리: 심포항에 신선횟집(063-543-6557), 뚝방회관(063-545-5503) 등 꼬막과 백합, 죽합 등 패류 전문 음식점들이 있다. 조개구이를 파는 집들도 여럿 있다. 김제 시내 남쪽인 금산면 원평리에 있는 총체보리한우촌(063-543-0076)은 고기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무농약 청보리와 총체보리 사료를 먹여 키운 한우의 육질이 무척 부드럽다. 꽃등심 1인분에 1만 8000원으로 가격도 양심적이다.
★잠자리: 심포항 인근에 사보이장모텔(063-544-6790)과 심포장모텔(063-545-1662)이 있고, 요촌동에 가면 꿈의 궁전(063-544-0066), 만경파크장(063-543-2280) 등이 있다.
★문의: 김제시문화관광포털(http://culture.gimje.go.kr) 문화관광과 063-540-3172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