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당직자가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수수 의혹에 정세균 대표(맨 왼쪽)가 연관돼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12월 24일 민주당 의원총회가 열린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회의장.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Mr. 스마일’이라는 별명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를 분노케 한 것은 자신의 측근이 구속 중인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2만 달러를 수수했다는 이 날짜 일부 조간신문의 보도였다. 정 대표는 2006년 12월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총리 공관 만찬장에서 곽 전 사장으로부터 인사 청탁과 함께 5만 달러를 수수했고,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이던 자신이 동석했었다는 검찰의 기소 내용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문제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며 ‘최소한의 대응’으로만 일관해오던 터였다. 그랬던 그가 ‘측근 뇌물수수 의혹’이 불거지자 폭발한 것이다.
정가에선 정 대표의 그간 소극적 대응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게 사실이다. 총리 공관 만찬 동석 사실이 보도돼 당이 발칵 뒤집어졌을 때도 그는 “검찰의 공소장 내용 분석이 먼저”라며 말을 아꼈다. 때문에 “정말 켕기는 게 있는 거 아니냐”는 설익은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다. 정 대표는 그러나 “한 전 총리가 저들(검찰)의 정치공작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그 기조에 맞춰야 한다는 판단에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해왔던 것뿐”이라며 이를 보도한 언론사에 대한 법적대응까지 예고했다.
정 대표의 강공 선회는 상황을 더 방치했다간 의혹만 키워 당장 예산투쟁은 물론 내년 지방선거까지 후유증이 갈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이다. 또 차기 대선주자로 발돋움하려는 자신의 정치일정에도 대형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는 관측이다. 아울러 지도부 교체를 주장하는 비주류 측이 “대표가 서둘러 입장표명을 해야 당이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압박한 것도 한 요인이 됐다는 지적이다.
민주당도 부글부글 끓었다. “한 전 총리에 대한 기소장이 마치 정 대표 기소장을 방불케 한다”(유선호 의원)는 것이다. 당초 민주당은 검찰이 한 전 총리를 옭아맬 때만 해도 ‘서울시장 출마 저지용’ 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 대표마저 사정권에 들자 ‘야당 말살 공작’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당장 24일 오후 의원단이 청와대와 법무부로 찾아가 “야당 죽이기를 중단하라”며 거센 항의를 하기도 했다. 한 핵심당직자는 “검찰이 야당 대표를 직접 겨냥하기는 1989년 서경원 전 의원의 밀입북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 수사 이후 처음”이라며 “정권의 자신감이 대단히 지나친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일단 민주당은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판단이다. 자체 확인 결과,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특히, ‘측근 뇌물수수설’은 ‘소설’로 단정했다. 우상호 대변인은 “정 대표 주변 사람들을 확인해본 결과, 돈을 받기는커녕 검찰에 불려갔던 사람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검찰에 불려갔다는 측근은 유령이라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실제 검찰도 이 부분에 대해선 꼬리를 내리고 있다. 이번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권오성 부장검사)는 2006∼2007년 곽 전 사장의 석탄공사 사장 후보 추천에 관여한 산자부 간부들은 형사처벌하지 않고 수사를 종결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품수수의 단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도 “산자부 공무원들을 상대로 필요한 조사는 다 했다. 현재로선 (범죄 혐의와) 관련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1야당 대표에 대한 수사는 전직 총리 수사와는 정치적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검찰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정 대표도 12월 24일 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자신에 쏠린 의혹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심지어 “수사가 불거질 때만 해도 내 문제가 이렇게까지 거론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내가 연루됐다는 소문을 듣고선 ‘별 싱거운 소리 다 있다’고 말했었다”고 기억했다.
정 대표는 곽 전 사장에 대해 “단둘이 만난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다. 또한 ‘장관 재임 당시 곽 전 사장을 석탄공사 사장으로 검토해보라고 했다’는 종전 해명에 대해서도 “당시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준비 때문에 사장 심사를 할 상황이 아니었고, 추천 역시 후임이었던 김 아무개 장관이 했던 것이다. 사장 심사도 산자부 소관이 아니라 해당공기업에서 하는 게 관례”라고 말했다. 또 “당시만 해도 곽 전 사장은 경영위기에 놓인 대한통운을 살린, 아주 유능한 경영인으로 알려졌던 사람”이라며 “설령 그와 잘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던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문제의 ‘총리 공관 만찬’에 대해서도 “한 전 총리로부터 ‘곽 전 사장을 잘 부탁한다’는 청탁도 없었고 그런 말을 주고받을 계제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정 대표는 “공관 만찬은 캐터링 서비스를 받는데, 외부인들이 서빙을 하러 들락날락하는 곳에서 그런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가능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정 대표는 급기야 전날인 12월 23일 이명박 대통령이 “걸핏하면 정치수사라고 비난하는 등 수사 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흔들림 없이 철저히 수사에 임해달라”며 사회 지도자층 인사들에 대한 비리 근절을 주문한 데 대해서도 “전라북도 사람들이 원래 잘 참다가도 마지막에 터지는 경향이 있다. 참을 만큼 참았다”며 좀처럼 쓰지 않는 격한 표현까지 내뱉었다.
여권 역시 민주당의 격한 반발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궁금한 대목은 ‘야당 탄압’ 논란이 불거질 것을 뻔히 알았음에도 왜 제1야당 대표를 건드리는 초강수를 뒀을까 하는 점이다. 민주당은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기획수사”라고 단정한다. 당내 주류가 한 전 총리의 서울시장 출마 선언을 고대하는 것도 여권의 이 같은 의도에 대한 맞불작전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올 6·2 지방선거는 시기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임기 절반을 도는 분기점이 된다. 만약 선거에서 패할 경우, 레임덕 가속화로 세종시 수정 추진과 4대강 사업 등 역점사업은 난관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또 한나라당 내 친이·친박 간 대치도 균형을 잃고 급속한 쏠림이 진행될 것이란 게 대체적 분석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노무현 참여정부가 지방선거 패배 뒤 레임덕에 빠졌던 사실을 여권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며 “그들은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짓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