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 ||
“정 대표는 지난해 10월 재·보선 시험에서 통과했어야 했다.”
최근 기자와 통화한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이 건넨 말이다. 이 의원은 “당내 입지가 취약한 정 대표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길은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진 것이 정 대표 책임은 아니지만 그 이후 당 내부에선 (정 대표를) 임시직으로 ‘평가절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정 대표 본인 역시 주류인 장광근 사무총장이나 안상수 원내대표 등의 눈치를 보는 듯해 안타깝다고 말하는 의원들이 제법 있다”고 전했다.
사실 정 대표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2007년 12월 대선 직전 입당해 ‘개국공신’과는 거리가 멀었고, 정권 출범 후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당 주변을 맴돌았다. 특히 한나라당 당직자와 의원들 중에선 아직도 ‘지난 2002년 대선 패배 원인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거의 막판까지 손을 잡았던 정 대표 때문’이라며 마음을 열지 않는 이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안상수 원내대표 역시 사석에서 수차례 정 대표의 이러한 ‘아킬레스 건’을 거론하며 불만을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 원내대표는 정 대표가 재·보선에 출마하는 박희태 전 대표로부터 대표직을 ‘승계’받는다는 것 자체를 공개석상에서 불쾌해하기도 했다.
당내에 자신의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정 대표는 취임 초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다. 대외활동과 함께 소속 의원들과의 스킨십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 초선 의원은 기자에게 “정 대표 취임 후 식사 한 번, 차를 두 번 마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동료 의원들도 비슷하더라. 6선 의원인 정 대표가 초선인 나에게 많이 도와달라고 했는데 절박한 마음이 느껴졌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친이와 친박으로 양분된 당내 구도는 공고하기만 했다. 정 대표도 지난해 12월 15일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이를 빗대 “당이 칸막이에 막혀 산소 공급이 안 되고 있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정 대표의 한 측근 역시 기자에게 “지난 100일 동안 정치에 입문한 이후 가장 바쁘게 보냈다.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현실의 벽은 역시 높았다. 대표가 말한 것을 사무총장이나 원내총무가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지원사격을 화끈하게 해줬더라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최근 이뤄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사면을 둘러싼 당과 청와대 움직임은 정 대표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는 듯하다.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 논의가 본격화될 무렵인 지난해 12월 14일 정 대표는 “이른 감이 있다”며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 결정은 정 대표 뜻과는 상관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당시엔 이미 허용해주는 쪽으로 거의 결론이 나 있는 상태였다. 정 대표 발언과는 별개로 당으로부터도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고 전했다. 청와대 측이 당 대표가 아닌 다른 라인을 통해 이 전 회장 사면에 대한 입장을 보고받았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의 여권 관계자는 “한나라당 내부에서 주류 측이 정 대표에게 보고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말들이 파다하다”고 귀띔했다.
정 대표의 ‘대통령+여·야 영수 회담’ 제의도 야당에겐 환영받았지만 청와대와 당 주류 측으로부터는 단번에 거절당했다. 이동관 홍보수석은 “예산 문제가 대통령 앞에서 할 이야기인가”라며 직격탄을 날렸고 장광근 사무총장 역시 “여의도 문제의 최종 해결사는 정당이지 대통령이 아니다”라며 정 대표에게 면박을 줬다. 이를 놓고 한나라당에서조차 ‘당 대표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동정 여론이 일기도 했지만 정 대표를 탓하는 이들이 더욱 눈에 띄었다. 한 정치 컨설턴트는 “정 대표 제안은 야당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지만 대통령은 잘해야 본전이었다. 이를 계기로 여권에서 정 대표 정치력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늘어났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지난해 12월 22일 정 대표가 4대강 사업에 대해 “국민이 바라는 사업인가에 관해선 좀 회의가 들지만…”이라고 말한 것을 두고서도 당 차원에서 “와전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내부에서는 엄청난 비난이 들끓었다는 후문이다.
당 안팎에서 정 대표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검찰이 지난해 10월경 정 대표가 최대주주(지분율 10.80%)로 있는 현대중공업을 압수수색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검찰의 복수 관계자는 “관련 첩보가 있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대중공업 본사에 직원 두 명이 방문해 관련 자료들을 가져온 것은 맞다”면서 “12월 초엔 정 대표와 관련이 있는 재단 한 곳에 대한 자료도 수집했다”고 전했다. 검찰에 따르면 아직 특별한 혐의를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집권당 대표 주변을 사정기관이 주시했다는 것만으로도 갖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정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7월 전당대회까지는 이제 길어야 6개월여 남짓. 당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조기전대가 열릴 경우 그 기간은 더욱 짧아지게 된다. 이대로 ‘무기력한 대표’로 남는다면 차기 대권의 꿈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특단의 승부수가 절실한 시점인 셈이다.
이와 관련, 정 대표의 최근 행보가 눈길을 끈다. 계파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개방형 국민경선) 공천제를 주장하고 나섰고, 주류 측 수장인 이재오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과도 얼마 전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정치권에선 정 대표가 내년 지방선거 승리로 ‘대반전’을 이뤄내기 위한 시나리오 마련 작업에 한창이라는 소문도 들린다. ‘집권당 대표’라는 타이틀이 정 대표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올 한 해 정국의 또 다른 관전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