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 | ||
사실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선거구제 개편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왔다. 하지만 선거제 개편에 따른 유·불리를 계산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때문에 한 정당 내에서도 서로 다른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 전문가들은 “선거구제 개편 논의는 한국 정당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정권을 통해 논의돼왔지만 부분적 개선 외에는 근본적 개혁을 이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과연 이 대통령이 ‘신년과제’ 중 하나로 언급한 선거제도 개혁이 실현될 수 있을까. 각 정당 및 잠룡들의 엇갈리는 입장을 들여다보았다.
2010년 정치권의 가장 큰 이슈는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다. 지방선거와 함께 최근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개헌 및 선거구제 개편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지역주의 청산을 위한 선거구제 개편과 행정구역 개편을 화두로 내놓았고, 대통령 임기를 조정하는 헌법 개정을 주장한 바 있다. 그중에서도 이번 신년사에 포함된 ‘선거구제 개편’ 논의는 올 한 해 지방선거 이슈와 함께 정가를 달굴 것으로 전망된다.
이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8·15 경축사를 통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구제 개편을 주장했고 이어 9월에도 연합뉴스와 일본 교도통신과의 공동인터뷰를 통해 “지금의 선거구제로는 동서 간 화합이 이뤄질 수 없는 만큼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를 결합한 선거구제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부분을 정치권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내에서도 이 대통령의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의지는 강력하다고 평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여당이 손해를 보더라도 꼭 이루어야 한다”며 선거제도 개편에 방점을 찍는 이유 중 하나는 ‘국회의원이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지역에 매몰되지 않고 의정활동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는 경험적 소신 때문. 이 대통령이 제안한 ‘소선거구제+중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는 ‘중+대 선거구제’ ‘석패율제’ 등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선거구제 개편의 필요성 자체에는 민주당과 기타 야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역시 찬성하고 있는 입장이어서 여야의 ‘초당파적’ 의지만 있다면 논의가 급진전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정가의 분위기다.
그렇다면 선거구제가 개편될 경우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될까. 선거구제 개편은 정당 차원뿐 아니라 의원들 개개인의 사활이 달린 문제여서 그 어떤 사안보다 논의가 뜨거워질 가능성이 크다. 기본적으로 한 선거구 내에서 최다 득표를 한 1명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로 운영돼온 우리나라의 선거구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차례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소선거구제는 선거비용이 적게 들고 군소정당 난립을 막아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되는 장점이 있지만, 정치신인을 발굴하기 어렵고 한 정당이 특정 지역의 의석을 독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지역주의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줄기차게 제기돼 온 것.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선거구제를 도입한 적이 있었다. 1973년 9대 국회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 12대 국회까지 지역구별로 2명의 의원을 선출한 중선거구제가 치러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2명의 의원만을 선출하는 방식이어서 근본적으로 소수 정당에게 불리하고 거대 정당에게 유리한 구조였다. 이 때문에 중선거구제를 다시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한 선거구에서 2명의 의원을 뽑는 방식은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해소하는 데 미흡하다는 반대의견이 높다.
중·대선거구제의 경우 ‘사표’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최다득표자 1명만이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와 달리 여러 명을 당선시키는 중·대선거구제에서는 다양한 유권자의 지지도가 반영될 수 있는 것. 정치전문가들은 “2인이 아닌 3~5명을 뽑는 선거구제를 도입한다면 영남지역에서의 민주당 후보 당선율이 높아질 수 있고 역시 호남권에서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율이 높아질 수 있어 양당에 모두 유리하다. 또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게도 기회가 커지는 것”이라고 전망한다.
비례대표제(정당의 총득표 수의 비례에 따라 당선자 수를 결정) 또한 이러한 사표 발생을 줄이고 거대 정당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민주노농당이 2004년 총선에서 10석이나 얻어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비례대표제 덕분이었다.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란 전국구 비례대표제를 보완한 것으로, 전국적으로 득표한 비율만큼 비례대표의원 수를 할당하는 것과 달리 경상도 혹은 전라도 등으로 특정 권역을 나누어 그 지역의 득표율로 비례대표를 뽑는 것을 말한다. 또한 한 후보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동시에 출마하게 해서 중복 출마자들 중 가장 높은 득표율로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뽑는 ‘석패율 제도’까지 보완제도로 함께 거론되고 있다.
▲ 김문수 지사(왼쪽)와 정몽준 대표. | ||
실제로 지난 2008년 18대 총선 결과를 분석해보면 지역구 득표율에서 43.45%를 얻은 한나라당이 가져간 지역구 의석 배분율은 53.47%인 데 반해, 민주노동당은 3.39%의 지역구 득표율을 얻었음에도 실제 의석배분율은 0.82%에 불과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전문가들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선거제도’라고 지적한다. 한나라당의 경우 중·대선거구제에서 유리한 다선 의원보다 초선 의원이 절반을 넘고, 지역구 수 면에서도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인 영남이 호남보다 더 많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으로 실익이 줄어들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이 “(여당이) 불리함을 일정부분 감수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점에서 비롯된 당내 반발을 우려한 때문이다.
반면 민주당과 기타 야권은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을 환영하고 있다. 민주당은 참여정부 시절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주의 완화를 위해 같은 내용의 선거구제 개편을 주장했던 만큼 지지의사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선거구제 개편과 행정구역 개편안을 동시에 들고 나왔는데 여기에 담긴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한 국면전환용이라는 의혹도 있다. 구체적인 안이 마련되면 그에 따른 논의를 해갈 것”이라고 전했다. 친노계의 대표인사인 이해찬 전 총리 역시 이와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제안하고 당시 6개 여야 정당이 18대 국회에서 개헌할 것을 합의한 만큼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지역주의 정치구조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자유선진당 역시 기본적으로 선거구제 개편에 대해서는 긍정적 입장이지만 보다 세분화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단순히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국회의원 수는 30% 줄이되 비례대표 의원을 50%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고 이를 당론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구제 개편이 대체적으로 한나라당에게 불리하다는 견해가 많은 만큼, 한나라당 내에서는 의견이 다소 엇갈리고 있다. ‘친이계’ 일각에서는 기본적으로 지금의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을 주장하고 있지만 지역구마다 2인 이상을 뽑자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2인 이상을 선출할 경우 민주당과 기타 야권에 더 유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 때문이다.
여기에 당내 대권주자별 입장도 혼재돼 있다. 정몽준 대표와 김문수 경기지사는 공개적으로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정 대표는 “일본의 파벌정치가 중대·선거구제 때문이었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권역별 대표제도 신중하게 권역을 좀 넓게 봐야 한다”고 말했고, 김문수 지사 역시 한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가 오히려 더 선진적이며 정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그렇다”며 “문제의 관건은 중앙집권화된 권력, 예산-권력-인사 등 모든 부분이 중앙집권화에 따른 경직성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반면 홍준표 의원은 “호남에서는 민주당, 영남에서는 한나라당 공천만 받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의원은 민의에 의해 뽑힌 선출직이 아니라 임명직”이라며 “호남에서 영남 출신을, 영남에서 호남 출신 의원도 뽑을 수 있도록 현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또한 여당 내에서 선거구제 개편을 실제로 추진할 수 있을지 여부는 친박계를 설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참여정부 시절 야당 대표로서 노 전 대통령의 선거구제 개편 제안에 대해 강력 반발했던 박근혜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의 제안에 어떤 입장을 취할지도 관심사다. 아직 구체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진 않지만, 박 전 대표는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에 대해 부정적이다. 또한 영남권에 대부분의 지역기반을 갖고 있어 선거제 개편에 의한 영향을 크게 받는 친박계 의원들도 “충분한 사전조율 없이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친박계는 ‘권역별 비례대표와 석패율 제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나 중·대선거구제는 반대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선거구제 개편은 ‘지역주의 청산’이라는 공통된 명분을 가지고 정권을 넘나들며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각 당과 계파 간 이해관계와 맞물리며 ‘국민들의 이해’와는 먼 정쟁만을 낳아왔다. 국회에서 또 다시 논의되고 있는 선거구제 개편이 얼마나 ‘민의’를 담아가며 진행될지 지켜볼 일이다.
MB 개편 카드 다시 꺼낸 배경
'노'땐 그렇게 '노(NO)'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