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지난해 8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 마련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공식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 ||
그런데 일부 정치 전문가들은 그 울림의 첫 시발이 지난해 말-올해 초부터 나타난 호남 민심의 변화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역주의 정서가 강했던 호남 일부 지역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지율 1위로 올라서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대 선거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는 중대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요동칠 조짐을 보이는 호남 민심 변화의 단초를 따라가 봤다.
역대 대통령선거를 보면 실시 3년 전부터 대권주자들이 서서히 몸을 풀기 시작하고 그에 따른 지각변동의 서막이 오름을 알 수 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3년 전인 1995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대선 레이스에 ‘다시’ 뛰어들었다. 이회창 현 자유선진당 총재는 1993년 12월 국무총리에 전격 발탁된 뒤 1995년 재야변호사로 잠시 쉬었다가 1996년 1월 신한국당에 영입된다.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 3년 전인 2000년 4월 총선에서 부산 낙마의 아픔을 겪었지만 그해 8월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돼 본격적인 대권 수업을 받게 된다. 상대후보 이회창 총재는 2000년 5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김덕룡 후보 등의 도전을 물리치고 연임돼 흔들리던 지도력을 다잡고 이른바 ‘대세론’ 가도에 처음 진입하던 해였다. 2007년 대선의 승리자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 10월 청계천 복원을 성공리에 마친 것을 계기로 차기 대권주자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된다. 민주당 정동영 후보는 2005년 6월 17일 통일부 장관으로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단독 면담을 성사시켜 여권의 화려한 대권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2012년 대선을 3년 앞둔 지금의 대권주자들과 정치지형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먼저 올해 <한국일보>가 실시한 대선주자 지지율 여론조사를 보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압도적 1위(31.7%)를 지키는 가운데 유시민(8.7%)-오세훈(5.1%)-손학규(4.5%)-정몽준(4.2%)-이회창(4.2%)-정동영(3.1%) 등의 잠룡들이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형국이다. ‘(지지후보가) 없다’ 또는 ‘무응답’은 31.3%였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2012년 18대 대선은 역대 선거와 그 전개 방식이 다를 수도 있다고 진단한다. 사실 기존 대권주자들은 대선 3년 전 어떤 형태로든 ‘커밍아웃’을 확실히 하며 대권 레이스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대권주자 중심의 경쟁 방식보다는 지역주의 변화 움직임과 정책 중심의 대선 지형에 기존 주자들이 종속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여론조사 기관의 한 전문가는 이에 대해 “이번 대선은 기존 대권주자들의 3년 전 부상과 그에 따른 대권 구도의 변화라는 공식이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박 전 대표라는 블랙홀이 다른 군소 후보들의 존재감을 모두 빨아들이는 바람에 생긴 현상이다. 앞으로 여야의 잠룡 가운데 얼마든지 치고 올라올 가능성은 있지만 박 전 대표를 위협할 만한 수준이 될지 의심스런 상황이다. 대선이 3년 남았지만 여전히 지금의 대권 구도는 박 전 대표 외에 그 어떤 잠룡들도 치고 올라올 모멘텀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이런 대권 구도의 변화는 차기 대선이 지역주의 완화와 정책에 따른 표심의 변화 등과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 판가름 날 가능성을 높여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외적 요인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요동치는 호남 민심이라는 것이다. 사실 일부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지난해 11월을 전후해 호남 민심에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에 대해 “지난해 말부터 대권주자들에 대한 호남 민심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호남의 지지율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지난 11월 초의 호남 지지도 조사에서 정동영 의원(21.7%)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17.6%)에 이어 3위(15.3%)를 차지했다. 한나라당 후보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수치다. 당시 정세균 민주당 대표(0.7%)는 거의 최하위에 랭크돼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는 그 변화가 더욱 가시적이다. 올해 <서울경제신문> 신년 여론조사를 보면 박 전 대표가 과거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광주·전라 지역에서 16.4%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 정동영 전 장관(14.7%)을 제치고 처음으로 여야 후보 가운데 호남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이다. 두 달 만에 박 전 대표의 호남 지지율이 3위에서 1위로 훌쩍 뛰어올랐다는 점은 호남 민심의 흐름을 해석하는 데 의미 있는 결과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호남 민심에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뿌리를 지켜온 한나라당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나 반감이 상당 부분 희석될 단초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바람은 이명박 대통령 쪽으로도 불고 있다. 호남 출신인 한나라당 박재순 최고위원은 최근 이에 대해 “(비록 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호남에서의 이명박 대통령 국정수행지지도가 항상 한 자리 숫자에 머물렀는데, 지난 12월 초 23% 정도로 오르고 있다”라고 밝히면서 “4대강 중 영산강은 모든 도민들이 다 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4대강에 대해서도 무려 27% 정도 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호남의 현 실정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말 4대강 살리기와 호남고속철도(KTX) 기공식에 잇따라 참석한 것도 호남 민심의 변화와 연동돼 해석되기도 한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광역지방자치단체장들이나 국회의원들은 지역 민심을 그대로 대변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에서 여야를 떠나 보조를 맞춘 것은 분명 한나라당을 보는 민심에도 변화가 있다는 신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
한편 박 전 대표에 대한 호남 민심의 변화 움직임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후 ‘포스트 김대중’ 주자를 찾지 못하는 호남 민심이 ‘잠시’ 박 전 대표에게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는 예산안 정국 등에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민주당에 대한 실망감의 표출도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호남 진보층은 유시민 전 장관에게로, 보수층은 박 전 대표에게로 표심이 쏠리는 다원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호남 민심의 반 한나라당 성향 희석 움직임은 차기 대선을 가를 매우 중요한 요소다. 먼저 박근혜 전 대표에게 정계개편의 동인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평소 호남에 대해 애정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온 박 전 대표가 세종시 문제로 친이그룹과 정면대결을 벌여 탈당 등과 같은 중대결심을 할 경우 민주당 일부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신당 창당의 활동 공간을 만들어줄 동인이 바로 우호적인 호남 민심에서부터 나올 수 있다.
호남 민심의 변화는 민주당의 차기 대선 승리를 더욱 요원하게 하는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특히 수도권에 널리 퍼져 있는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의식 성향이 변하고 있다. 이들은 한때 호남에 거주하는 토박이들과 함께 호남 민심의 진원지였다. 하지만 지역주의가 희석될 움직임과 함께 정책 중심의 새로운 여론이 형성되면서 수도권의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무조건 민주당을 지지할 가능성도 줄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수원 등의 수도권 선거에서 민주당이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그것은 야당의 순수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에 대한 견제심리가 큰 몫을 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호남 민심의 다원적 변화는 민주당이 다음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을 낮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면 어떠냐, 원칙을 지키고 탕평과 화합을 한다면 호남이 박근혜와도 손잡을 수 있는 것 아니냐”라는 호남 일각의 정서 확산은 차기 대선의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새로운 ‘나비효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2012년 대통령선거는 아직 3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역대 대선 후보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조금씩 ‘용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 레이스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 외에 다른 대권주자들의 발톱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18대 대선이 역대 선거처럼 대권주자들 본연의 능력과 비전,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경쟁보다는 다원화돼 가는 호남 민심과 4대강 사업 성공 여부 등의 외부 요인에 따라 결정이 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지는 원년으로 기록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박근혜 MB와 '세종시 전쟁' 막후
역대 대권후보처럼 차기 보장받기 '강수'
박 전 대표의 ‘세종시 투쟁’은 지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산 투쟁’을 결행해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권을 보장받았던 것이나, 이회창 총재가 지난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임명된 뒤 127일 만에 ‘허수아비 총리론’으로 사표를 내 대권 주자로 단번에 각인된 ‘투쟁사’와도 닮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 현재-미래 권력 간 투쟁사를 통해 세종시 전쟁의 미래를 예측해 보면 현재의 권력이 미래권력의 치받음에 대해 수세적으로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종시 전쟁은 정국 운영에 대한 1차적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고, 2인자는 언제라도 다음 기회에 차기를 향한 판 흔들기를 또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고지를 먼저 점령한 박 전 대표가 밑에서 깃발을 뺏으려 올라오는 친이그룹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대통령 레임덕의 분수령이 될 지방선거를 앞둔 친이그룹으로서는 세종시 전쟁에서 무조건 ‘고’를 외칠 수도 없다. 박 전 대표의 유세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세종시 전쟁이라는 소전투에서 목숨을 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도 세종시 문제로 당이 갈등의 늪에 빠지는 것을 깊이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청와대 정무라인 일각에서는 이미 세종시 문제에 대한 ‘출구전략’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청와대에서는 6월 지방선거 전에 ‘수정안을 포기하고 다음 정권에 결정을 넘기는’ 대통령 담화를 발표하거나, 친박그룹과의 공천 균점을 통한 화합책 마련 등의 타협론이 강경원칙론과 맞붙으며 물밑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일부 강성 친이그룹(이들은 박근혜 전 대표의 집권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세력이다)은 타협 없는 전면전을 주장하고 있어 여당 내부 갈등은 당·청간의 엇박자를 노정하며 더욱 깊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