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시 수정안을 찬성하는 지지자들(위)과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박사모 집회. | ||
그러나 일부 청와대 참모와 친이 인사들이 여전히 국민투표를 세종시 정국 돌파용 최선의 대안으로 주장하고 있어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할 듯하다. 이 대통령이 “현재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 것 역시 ‘현재’라는 말에 악센트를 찍을 경우엔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여권 핵심부의 이들 ‘국민투표론자’들은 투표 실시에 부정적인 기류가 우세한 여권 내부를 설득하기 위해 이른바 ‘3단계 로드맵’을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헌-남북정상회담-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라는 ‘빅 이벤트’를 단계적으로 활용하면 세종시 국민투표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정국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게 로드맵의 핵심 내용이다. 국민투표 추진 여부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청와대발 3단계 로드맵의 실체를 들여다봤다.
“할수 있는 것은 모두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토했다. 국민투표도 그중 하나였다.”
청와대에서 정무업무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청와대는 올해 1월 중순부터 약 3주 동안 ‘세종시 국민투표’와 관련된 사안들을 집중적으로 체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엔 법리해석을 비롯해 질문 내용, 후속 대책 등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공성진 심재철 차명진 등 몇몇 친이 의원들이 거론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다뤄지지는 않았던 국민투표와 관련해 여권 핵심부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던 것이다.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는 “일단 검토에 나섰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청와대까지 올라오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들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국민투표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면서 “세종시 수정안에 참여했던 실무팀 주도하에 실현 가능성을 면밀히 살펴봤다”고 귀띔했다.
정치권에선 사실상 외면 받다시피 한 국민투표 방안에 청와대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1월 11일 공개한 세종시 수정안이 예상과 달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부는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라며 느긋해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위기감’이 상당했다고 한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기선 제압에 실패했던 것은 인정한다. 설득이 될 거였으면 진작 됐을 것 아니겠느냐. 일주일이 지나도 (수정안) 지지율이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원안을 고수하는 세력과의 대립이 격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고 털어놨다.
청와대의 몇몇 참모들이 국민투표안을 다시 꺼내든 것도 이 무렵이다. 특히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는 A 수석이 진두지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가는 “당 출신인 청와대 인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갔더니 국민투표에 관해 의견을 묻더라. A 수석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여권의 한 싱크탱크가 청와대 측에 올린 보고서도 국민투표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 보고서엔 “국민투표가 성사될 경우 그 승패를 떠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장기적으론 득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종시 정국에서 박 전 대표가 ‘핍박받는 며느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국민투표를 통해 ‘고집불통 안방마님’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A 수석이 이 보고서에 상당한 공감을 나타냈다는 후문이다.
이 싱크탱크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우리가 국민투표에서 지더라도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박 전 대표가 안게 될 것이다. 당장에 세종시를 잃는 아픔은 감수해야 하겠지만 차기 대권을 생각하면 국민투표를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현 정권의 한 핵심관계자 역시 사석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고집스런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어 이러한 인식은 여권 내에서 상당한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약 3주간의 검토를 통해 국민투표가 법률적으론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세종시가 헌법 72조가 규정한 국민투표 대상(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이 되는지를 놓고 공방이 오가고 있지만 청와대에서는 이를 폭넓게 해석하면 위헌이 아니라는 법조계의 자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3월 3일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다수 헌법학자들이 세종시 국민투표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홍석 헌법학회장은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을 다수 형성이 어렵다고 해서 국민투표에 회부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반한다”고 말했다. 뜻밖의 위헌 논쟁이 불거지자 청와대에서도 국민투표의 법적 문제에 대해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투표가 치러질 경우 그 승산에 대해서는 청와대 내부에서도 견해가 엇갈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소수’이긴 했지만 승리를 점쳤던 인사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여섯 번의 역대 국민투표가 모두 찬성으로 결론 났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고 한다. 또한 세종시 원안의 대표주자 격인 박근혜 전 대표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역전승’을 노려볼 만한 요인으로 꼽혔다고 한다. 12월까지만 하더라도 40% 초반을 공고하게 유지하고 있던 박 전 대표 지지율은 1월 들어 30%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를 ‘세종시 피로감’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청와대 내에서도 ‘다수’는 국민투표에서 수정안이 원안보다 찬성표를 더 받기 힘들 것이란 견해를 내놨다고 한다. 이를 주장했던 한 청와대 관계자는 “박 전 대표 지지율이 국민투표까지 연결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또 역대 국민투표를 살펴보면 다섯 번은 헌법개정, 한 번은 고 박정희 대통령 재신임이 대상이었다. 지금처럼 특정정책을 가지고 투표한 적이 없어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미 1월 말 여론조사를 통해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원안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결론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관 수석이 국민투표를 염두에 둔 발언을 한 직후에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수정안에 대한 찬반(수정안 찬성 42.8%, 반대 45.8%)과 원안에 대한 찬반(원안 찬성 45.9%, 반대 42%)을 묻는 두 방식에서 모두 원안이 앞섰다. 청와대 관계자는 “근소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투표율은 결속력이 좋은 원안 지지자들이 훨씬 높을 것 아니냐. 수정안이 승리하기 힘들 것”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상당수 여권 핵심 관계자들은 왜 패배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종시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3단계 로드맵’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3단계란 개헌-남북정상회담-G20 정상회의를 의미한다. 설사 국민투표에서 수정안이 폐기되더라도 이런 ‘빅 이벤트’를 활용해 향후 ‘세종시 아젠다’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개헌 남북정상회담 G20 회의 모두 십수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국가 행사다. 아직 개헌과 남북정상회담은 미정이긴 하지만 올해 이것들이 동시에 추진될 경우 세종시 문제는 파묻힐 것이다. 청와대가 국민투표 후유증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아마 쉴 새 없이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세종시 원안에 사활을 걸었던 박 전 대표만 허공에 뜨거나 이미지에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로서는 잃을 게 없는 장사”라고 설명했다.
‘3단계 로드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우선 6·2 지방선거가 끝나고 난 뒤 개헌 논의를 지피는 것으로 신호탄을 쏜다. 이미 지난 2월 25일 ‘왕의 남자’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이 “연내에 개헌해야 한다”고 밝히는 등 친이 핵심들이 분위기를 달구고 있는 상태다. 세종시 수정안이 통과하지 못할 경우 ‘국면 전환용’으로 개헌론만 한 것이 없다는 판단에는 이미 친이 주류 상당수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이어 8·15 광복절을 전후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것이 두 번째 단계다. 국가정보원 등 관련 기관에서도 올해 상반기가 아닌 하반기를 목표로 물밑 접촉에 나서고 있는데 그 시기가 8월 중순이 될 것이란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들리고 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열리는 G20 정상회의가 3단계의 마침표를 찍을 전망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개헌과 남북정상회담이 어떻게 될지 아직 불투명하기 때문에 시나리오대로 진행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 가지 모두 세종시 문제를 덮을 만한 초대형 이슈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세종시와 개헌은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대립하는 구도인데 현재 상황이라면 통과되기 힘들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이 잇달아 밀리면 국민들에게 ‘우리는 피해자’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과 G20 회의가 열리면 이 대통령은 글로벌 지도자라는, 박 전 대표와 구별되는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 여러모로 3단계 로드맵은 유용할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국민투표를 실시하기까지는 앞으로 적지 않은 장애물을 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법률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당장에 정치권에서 극심한 반대 여론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국민투표에 대해 “자기네들끼리 당론을 모으지도 못하면서 무슨 국민투표냐. 검토조차 해서도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친이 내부에서도 부정적인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이상득계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세종시 문제는) 일단 국회에서 처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위헌적 요소도 있는데 무리할 필요가 있느냐”고 지적했다. 아군에서조차 이러한 말들이 나오자 청와대에서도 당황해하는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이 이동관 수석의 발언을 서둘러 해명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일 것이란 관측이다.
이처럼 국회 반발로 국민투표 논의가 수그러들긴 했지만 여권 내 일각에선 여전히 ‘3단계 로드맵’을 내세워 그 당위성을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A 수석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 일부 참모진들이 물밑에서 당 의원들과 개별 접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여전히 국민투표 가능성이 ‘잠복’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의도의 한 정치컨설턴트는 “패는 이 대통령이 쥐고 있는 것 같다. 개헌 정상회담 G20으로 이어지는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최종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