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그런데 지방선거 공천 확정을 한 달 반 앞둔 박 전 대표의 최근 행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중동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중앙당 공천심사위원회 구성을 두고 친이-친박 간의 힘겨루기가 있었지만 직접 언급은 자제한 채 측근들을 통해 형식적인 대응만 했던 것도 이례적이다. 이런 박 전 대표의 ‘잠행’을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지방선거에서 발을 빼기 위한 의도된 행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세종시에 대해서는 ‘비타협’을, 지방선거와 관련해서는 ‘비협조’라는 양대 전략을 통해 친이그룹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친이를 향해 쏘는 ‘소리 없는 총격’의 막후를 따라가 봤다.
“박근혜 전 대표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작심하고 발을 빼려는 것 같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최근 박 전 대표의 ‘저강도 행보’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철저하게 방관자로 머물기 위한 사전포석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 그동안 정치권에선 그의 지방선거 유세 지원 여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의견에서부터 일부 친박 후보들에 대한 조건부 지원 아니면 아예 철저하게 방관하는 경우의 수까지 두루 거론됐다. 그런데 최근 이성헌 의원의 중앙당 공천심사위원회 참여 여부를 두고 친이-친박 간 논란이 불거졌을 때 박 전 대표는 강경 대응을 자제하고 측근들을 통해 원칙적인 입장만 ‘조용히’ 밝혔다. ‘국민도 속고 박 전 대표도 속은’ 지난 2008년의 친이 공천 ‘학살’을 떠올린다면 지방선거 전초전인 공심위 구성 전쟁에서 너무 쉽게 물러선 것이 아니냐는 뒷말도 많았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이번 지방선거에 목숨을 걸었다면 아마 공심위 구성부터 강경 대응을 지시했을 것이다. 애초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박 전 대표의 ‘복심’인 이성헌 의원의 정치적 위상 때문에 친박 측도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전쟁 이틀 만에 친박 의원 1명이 더 들어가는 선에서 싱겁게 타협이 이뤄졌다. 최근의 세종시 정국에서 철저하게 비타협으로 일관한 것에 비하면 ‘이성헌 논란’은 친박이 너무 쉽게 두 손을 든 경우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지방선거 전초전에 대한 ‘저강도 대응’은 다른 곳에서도 포착된다. 아직 공천 확정까지 한 달 반 이상 남아 있지만 친박 후보들의 잇단 불출마 선언이나 출마를 주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지난 2006년에 이어 대구시장 재수에 도전하는 서상기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배경을 두고 ‘박심’ 개입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사실 서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하기 전 대구시장 ‘재수’에 상당한 의욕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박 전 대표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차례 만나는 등 다양한 경로로 ‘수장’의 의중을 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서 의원에게 “아직 시간이 좀 있잖아요”라며 즉답을 피했다고 한다. 사실상의 거부 의사였던 셈이다.
박 전 대표로부터 출마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받지 못한 서 의원은 결국 불출마 쪽으로 선회하며 뜻을 접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서 의원에게 국회에서 대권을 위해 힘을 써달라는 의사를 전달해 서 의원이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친이의 김범일 현 시장이 앞서고 있어 서 의원이 일찌감치 포기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지역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그가 보스의 확실한 지원 약속만 받았다면 경선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상 박 전 대표가 서 의원을 주저앉힌 것인데 그 배경이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여당 주변에서는 친박 성향의 또 다른 후보도 충청권 단체장 선거에 나서려 했다가 박 전 대표가 말려 중도에 포기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박 전 대표의 공천 전 ‘저강도 대응 전략’은 본격적인 선거전이 펼쳐질 경우 전면적인 지원 유세 비협조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최근 한 언론은 친박 고위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 박 전 대표가 6월 지방선거에 지원유세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를 했다가 친박 진영의 항의를 받고 기사를 뺐다고 한다. 친박계 핵심인사가 “박 전 대표가 아직 그런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며 기사를 빼달라는 요구를 해 해당 언론사가 이를 수용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
▲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친박 진영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명분을 중요시하는 박 전 대표의 스타일로 볼 때 세종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세종시 문제 때문에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언급한 만큼, 세종시 문제가 어떻게 결론 나느냐에 따라 선거지원 활동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세종시 정국이 지방선거 이전에 결론이 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당연히 박 전 대표도 유세 비협조로 나갈 확률이 높다.
박 전 대표가 이렇듯 지방선거 비협조 모드로 나가는 이유에는 정치 공학적 계산이 깔려 있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세종시 문제로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의 유권자들에게 국민투표에 준하는 의사결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수정안에 찬성하는 숨겨진 표심이 서울시장 친이 후보의 당선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반면 박 전 대표 입장에서는 정반대의 셈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수도권에 포진한 친박 지지층이 친이 후보들에게 투표를 하지 않고 ‘보이콧’을 할 경우 상당히 고전할 것이란 얘기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선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서울시장을 비롯한 수도권 3곳에서 친박 성향 후보가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 친이가 강세인 지역이라 모두 그쪽에서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 지지자들은 그 후보들을 지지하게 될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친박 성향 지지자들은 대부분 전통적 한나라당 지지자들이기 때문에 선거 막판에 결국 친이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는 쪽과 세종시 정국에서 이 대통령에게 환멸을 느낀 친박 지지자들이 대거 투표에 불참해 민주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승리하게 되는 두 가지 경우다. 친박 지지자들이 박 전 대표의 유세 비협조 행보를 ‘투표에 참여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해석해 수도권에서 선거 미참여로 대응한다면 세종시로 박 전 대표를 핍박한 이 대통령에게 매서운 복수를 하는 셈일 것”이라고 말했다.
장외 친박 지지세력인 미래희망연대의 역할도 변수다. 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미래희망연대도 이번 선거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일부 경합지역에서 친이 후보들을 제치고 당선할 가능성은 낮지만 표 분산으로 그들을 낙선케 할 변수는 충분히 된다”라고 말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에 대해 “박근혜 지지층은 상당히 견고하고 적극적인 한나라당의 골수 지지자들이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을 지지하는 층은 중도를 중심으로 외연은 넓지만 견고하지가 못하다. 이는 친박 지지층이 친이 후보에게 투표를 하지 않는 적극적 저항으로 나타날 수 있는 반면 친이 지지자들의 경우 그에 비해 소극적인 성향이라 친이 후보에 대한 적극 투표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의 지방선거 유세 비협조가 여당의 참패로 이어질 경우 그 득실은 어떻게 될까. 물론 박 전 대표에 대한 책임론이 일 것이다. 당내에서 ‘전국 규모의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는 동안 박 전 대표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비판 여론이 조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201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박 전 대표의 당내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먼저 지방선거는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 아래 치러진 정권 중간평가 성격이었다는 점과 세종시 논란을 자초한 이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라는 명분이 박 전 대표의 책임론을 희석시킬 수 있다. 지난해 재보선에서 박 전 대표가 유세를 하지 않아 여당이 패배했지만 그 책임을 전적으로 덮어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는? 선거를 주도한 친이가 지방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권력의 추는 여당의 차기 주자로 급격하게 옮겨가면서 청와대는 고립되고 이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년과 같은 쓸쓸한 처지로 내몰릴 가능성이 있다. 특히 골수 친이 의원들을 제외한 의원들의 주류 엑소더스(탈출) 현상도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친이 의원들의 차기권력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지게 되고 당은 급속하게 박 전 대표의 수중 속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이는 박 전 대표가 의도하지 않아도 역대 정권의 권력 이동을 보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변수는 단 하나다. 다가올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층이 어떤 식으로든 복원돼 친이-친박을 떠나 여당 단일 후보를 철저하게 지지하느냐, 아니면 분열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세종시 정국에 있어 철저한 비타협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시 딜레마가 풀리지 않는 이상 지방선거 또한 철저한 비협조 모드로 갈 가능성이 있다. 현재로선 박 전 대표가 맞을 유세 비협조에 대한 역풍보다는 그 난국을 자초한 이명박 대통령이 독박을 쓰는 쪽으로 판이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