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른쪽 사진은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모습. | ||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정권의 이러한 움직임을 6월 지방선거와 연관 짓는 시각이 우세하다. 참여정부 비리를 부각시켜 선거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여권의 전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또한 이번 선거의 최대 변수 중 하나로 꼽히는 ‘노풍’을 차단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야권에서 ‘표적 수사’ 논란이 일 조짐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 등에서는 이번 조사가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선포한 ‘비리와의 전쟁’의 일환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모든 정치 일정의 알람시계가 지방선거로 맞춰진 지금, 사정기관들이 참여정부의 에너지 사업 등을 살펴보고 있는 내막을 따라가 봤다.
지난 3월 중순 청와대 근처 한 장소에 몇몇 사정기관 직원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이들이 나눴던 대화의 주요 내용은 다름 아닌 ‘오일 게이트’였다. 참여정부 시절이던 지난 2005년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을 둘러싸고 여권 실세의 개입 의혹이 제기돼 특별검사로까지 번졌던 오일 게이트가 사정 관계자들 사이에서 5년여 만에 다시 ‘화두’로 등장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최근 참여정부 에너지사업 의혹에 대해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 사정기관들의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는 게 정가의 관측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복합적인 이유들이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우선 역대 정권들이 집권 3년차에 권력형 비리가 터지면서 조기 레임덕 현상을 맞아야 했던 것을 반면교사로 삼기 위한 것이 첫 번째 목적이고, 두 번째는 특검이 밝혀내지 못했던 사건의 몸통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뭔가 새로운 내용이 발견되면 여의도에 사정 광풍이 몰아닥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일 게이트’뿐만이 아니다. 지난 3월 초 사정기관 실무자들이 비공개 회의에서 첩보공유 등 협력체제 구축을 논의한 데 이어 3월 9일 이명박 대통령이 권력형 비리에 대한 척결 의지를 강조한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실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등은 참여정부와 관련된 의혹들에 대해 전면적인 스크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경찰의 한 관계자는 “기관끼리 경쟁이 붙어서 엄청난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일단은 과거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차원이긴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것들이 드러나면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각종 게이트로 인해 권력 누수를 겪어야 했던 지난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재점검’ 차원에서 이뤄지는 조사라는 얘기지만 사실상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동안 ‘올스톱’됐던 참여정부에 대한 사정을 다시 시작하는 신호탄으로도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민정수석실을 컨트롤 타워로 하는 사정기관들은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에너지 사업들을 집중적으로 체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너지 사업의 특성상 비자금 조성이나 사업 수주 특혜가 빈번하게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지식경제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사실 에너지 사업의 경우 비리의 소지가 없을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중국이나 아프리카 등지에 유전을 개발한다고 치자. 사업자는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들어 와서 지원을 요청한다. 거기엔 유전 전문가의 분석과 현지 탐사 등이 담겨 있다. 우리가 나름대로 실사를 하긴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여러 압력이 들어오기도 한다”면서 “설령 개발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사업자가 ‘막상 파봤더니 유전이 없었다. 우리도 손해를 봤다’고 하는데 뭐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것 같다. 태양광과 같은 첨단 에너지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털어놨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참여정부 때의 각종 의혹사건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이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사정기관들이 에너지 사업을 ‘타깃’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검찰은 이미 지난 2008년 에너지업체인 K 사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인 바 있다. 여기에 연루됐던 인사들은 대부분 실형을 선고받았고, K 사는 주식시장(코스닥)에서 퇴출된 상태.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K 사 사건을 맡았던 한 검찰 수사관은 “K 사 대표 이 아무개 씨로부터 뇌물을 받은 고위 공무원이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면 수사는 정·관계 로비로 확대됐을 것이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검찰은 당시 이 씨가 만든 뇌물리스트를 입수해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검찰은 얼마 전 또 다른 에너지업체인 I 사에 대해 내사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006년 정부로부터 거액의 지원금을 받은 I 사가 비자금을 조성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한 정황을 포착했기 때문인데, 이와 관련해 민주당 몇몇 현직 의원 등 정계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어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여권의 전 방위 사정 행보를 지방선거와 맞물려 해석하고 있다.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위원회 이사장,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의 적절치 못한 발언이 잇달아 구설에 오르면서 선거에 ‘적신호’가 켜진 여권의 위기감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급 의원은 “지난해 10월 재·보궐 선거는 김제동·손석희 때문에 졌다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엔 김우룡·안상수가 표를 깎아먹고 있다”면서 “한명숙 전 총리가 무죄라도 받는다면 우리는 선거에서 완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방선거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서울시장 후보로 거물급 인사를 전략 공천해야 한다는 ‘제3후보론’(<일요신문> 932호 참고) 역시 한 전 총리 무죄에 따른 후폭풍을 대비한 시나리오였다.
특히 여권은 아직 표면화되진 않았지만 선거 막판에 불어 닥칠 ‘노풍’을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으로 나뉘어 있는 친노 인사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1주년(5월 23일)을 전후해 대대적인 추모식을 열 예정이고, 수첩·막걸리 등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회고 상품’의 판매도 준비 중이다. 이들은 추모 열기를 10일 후 치러지는 지방선거까지 이어간다는 전략도 세워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참여정부의 한 전직 청와대 비서관은 “이번 지방선거는 노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 세력의 부활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국민들이 많은 지지를 보내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여권으로서도 지난해 10월 재·보선의 ‘위태로운 기억’을 곱씹어보면 노풍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절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당시 한나라당 텃밭인 경남 양산에 출마했던 박희태 전 대표는 ‘노무현’을 앞세운 ‘정치 신인’ 송인배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고전 끝에 겨우 승리했었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노풍의 강도에 따라 지방선거 승패가 좌우될 것이라는 전망엔 동의한다. 우리로서는 최대한 그 세기를 낮춰야 승산이 있는데 참여정부의 치명적 비리가 드러난다면 해볼 만한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권 일각에서는 사정 드라이브의 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표적 수사’ 논란이 일 경우 ‘노풍’에 오히려 부채질을 해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민주당은 이 대통령이 권력형 비리 척결을 밝히고 나선 것에 대해 ‘지방선거용’이라며 공세를 가하고 있기도 하다.
중립 성향의 한 한나라당 의원은 “야권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무리한 검찰 수사로 서거했다고 본다. 그런데 또 사정기관이 참여정부를 들쑤시면 여론이 어떻겠느냐. 안 하느니만 못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진과 사정기관 실무진들이 ‘비리 혐의가 있으면 원칙대로 수사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당분간 ‘사정 모드’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한 중진급 의원은 “배나무 밑에서 갓 고쳐 쓰지 말라는 속담도 있지 않느냐. 청와대는 별 다른 뜻이 없을지 몰라도 지방선거 전에 여의도에 사정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누가 봐도 정치적인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