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수고 버리고 바꾸고…판사들 휴대폰 대부분 파기
“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버렸다.” “휴대폰을 분실했다.” “사용한 지 오래되어서 바꿨다. 휴대폰 뒷면을 열고 송곳으로 찍은 뒤 버렸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봉수)가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일어난 재판거래·법관 사찰 의혹과 관련해 현직 판사들을 불러 조사하는 과정에서 받아낸 진술들이다. 검찰은 이런 일관된 판사들의 움직임이 ‘증거인멸에 나선 사례’라고 보고 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본관 중앙홀 한쪽 벽면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통상 휴대폰은 매우 중요한 수사 자료다. 문자 메시지는 물론, 카카오톡과 같은 SNS 메신저를 통해 보고와 지시가 오간 정황을 찾아낼 수 있다. 또 휴대폰에 저장된 각종 보고 자료나 기록들은, 컴퓨터보다 삭제가 쉽지 않아 종종 수사의 스모킹건(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자료)으로 활용되곤 한다.
하지만 판사들은 달랐다. 사법행정권 남용 시점 사용했던 전화는 물론, 최근 휴대전화가 변경된 이유를 묻자 대부분 “최근에 바꿨다”고 답했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 필요한 압수수색 등 영장 청구가 잇따라 법원(서울중앙지법)에서 기각되자 이 같은 수사 기밀에 가까운 내용들을 먼저 밝히고, 법원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판사들이 수사의 핵심 증거가 될 수 있는 휴대폰을, 통상 사용 기간(1년 이상)이 되지 않았음에도 바꿨다는 게 검찰 측의 설명이다. 검찰 관계자는 “짧게는 2~3개월 만에 휴대전화를 다시 바꾼 경우도 있었다”며 “이런 게 상식적이냐, 치밀한 증거인멸”이라고 지적했다.
# 현 정부 들어서기 전부터 내부 징계 시작
하지만 판사들은 당연한 흐름이라는 입장이다. 사안이 검찰 수사로까지 번진 것은 최근이지만, 이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내부 징계가 시작됐기 때문.
이번 사안으로 최근 검찰 수사를 받은 한 판사는 실제 기자에게 “앞서 3차례 법원행정처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휴대전화 등을 다 제출했고, 이 조사가 끝난 뒤 휴대전화를 처분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처분하는 게 문제가 될까봐 법원 자체 조사가 끝난 뒤 휴대전화 변경이 문제가 될지 등도 다 문의해 가며 신중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이미 검찰 수사를 예상하고 대응했다는 게 그의 언급인데, 실제 임종헌 법원행정처 전 차장 등은 검찰 수사 가능성이 언론에 제기되자 텔레그램에 가입하는 등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대응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 다른 법원 관계자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지 않지만 협조하겠다’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느냐”며 “그 과정에서 이미 검찰 수사에 대비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사건에 관련된 판사들이 대응에 나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오른쪽)과 고영한 대법관이 8월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고영한·김창석·김신 대법관 퇴임식에서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검찰은 이 같은 사실들을 언론에 먼저 밝혔다. 영장 기각 사유를 검찰이 스스로 밝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수사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사법부를 강하게 압박하는 수단으로 언론을 활용한 것이다. 법원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고수하고 있다. 자연스레 수사 진척이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활용할 수 있는 압박 카드가 줄어들고 있는 검찰이 불리하다는 것이다.
검찰은 심지어 8월 27일 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영장 기각 정황도 밝혔다. 서울중앙지검수사팀 관계자는 서울중앙지법 박범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최근 ‘전교조 법외노조화’ 소송에 행정처가 개입한 부분, 박근혜정부 청와대의 이른바 ‘관심 사건’에 대한 대법원 재판연구관 보고서를 유출한 부분 등 수사를 위해 검찰이 고영한 전 대법관(행정처장 겸임) 등 전현직 판사들을 상대로 청구한 압수수색영장을 모두 기각했다고 털어놨다.
법원은 “고 전 대법관이 직접 문건을 작성하거나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재판연구관실 압수수색은 재판의 본질적인 부분 침해가 우려된다” “행정처의 검토·보고 문건이 재판의 결론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 등의 이유를 내놨는데, 검찰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잇따른 영장 기각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에 법원을 확실히 문제 삼겠다는 의지가 강력하다. 이를 위해 대법원이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김수천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 사건 당시 검찰 측에 ‘수사하지 말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내려 한 사안도 들여다보고 있다. 당시 대법원 측이 검찰총장과 대검찰청 등 수사 정황을 파악하려 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인데, 수사는 이제 시작 단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수사를 받고 온 한 판사는 “아직 해당 사안에 대해서는 검찰로부터 일절 질의를 받은 바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 확대에 대해서는 판사들은 불편한 시각을 숨기지 않는다. 한 고위법관은 “김수천 전 부장판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이 내부 조직원의 비위 흐름을 확인하고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검찰 측에 확인할지 여부를 내부적으로 의견을 모아본 게 죄가 되냐”고 날선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는 법원과 검찰의 갈등에서 ‘최후의 승자’는 법원이 될 것이라는 게 법조계 다수의 평이다. 수사의 시작은 영장 발부인데, 법원이 영장을 내주지 않는 한 검찰이 추가 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1971년 법원과 검찰이 정면으로 충돌한 1차 사법파동 역시 법원 비리 의혹을 수사하려던 검찰이 판사의 뇌물수수 단서를 잡고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에서 매번 기각돼 수사에 실패한 바 있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수사에 있어 영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법원이 가지고 있는 영장 발부권이라는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지, 검찰이 경찰에 영장 청구권을 내주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게끔 해주는 좋은 사례”라고 평가했다.
안재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