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입니까?” 얼떨떨해진 내가 되물었다. 이혼녀-솔직히 충격이었다. 나는 그제껏 그녀에게서 전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했었다. “그럼 뭐라고 생각했어? 노처녀?”
“아, 아뇨. 서류에는 기혼으로 나와 있길래….” “기혼이야 기혼이지. 한 번 결혼은 했었으니까.”B대리가 키들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정화 과장의 깔끔한 외모는 겉보기에 처녀라고 해도 어울렸다. 아니 유부녀라 해도 많아야 한두 살짜리 아이를 둔, 잘 나가는 맞벌이 가정의 미시족 쯤으로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자네 오늘 봤어? 어휴, 그년 히프가 얼마나 크던지…. 치마가 안찢어지는 게 신기하더라.” 두 명의 대리는 다시금 그녀의 몸매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무리 직속상사라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안주거리 ‘그년’에 불과한 것 같았다.
나는 무심결에 그날 이정화 과장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요즘 유행하는 무릎길이의 꽉 끼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달라붙은 치맛자락이 하반신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스타일이었다.
때로는 미니스커트보다 그런 몸에 감기는 치마가 훨씬 적나라했다. 우연히 훔쳐본 그녀의 뒷모습은 엉덩이 사이가 한껏 벌어져 가로로 팽팽하게 주름까지 당겨져 있었다. 그리고 터질 듯한 그 계곡에 굽 높은 하이힐이 아슬아슬한 무게를 실어 주고 있었다. 필경 허벅지에 살이 올라 그렇겠지만, 얄팍한 천에 감싸인 둔부는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씰룩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출렁출렁 흔들리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A대리가 지껄였다.
“그렇게 큼지막한 궁둥이랑 그짓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죽여 주겠지? 하여간 같은 부서인 게 한이야. 팀만 달랐어도 어떻게 꼬셔 봤을 텐데.” B대리의 대꾸가 돌아왔다.
“이정화 과장을? 관둬.” “왜?” “내가 먼저 찍어뒀거든. 두고 봐, 언젠가 그년 엉덩이를 철썩철썩 두들겨 줄 테니까.”와하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대리들은 호기롭게 잔을 부딪쳤다. 나도 덩달아 술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 이정화 과장의 벌거벗은 몸매가 그려졌다. 확실히 근사할 성싶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학교 선배라서일까-그녀가 이혼녀란 이야기는 왠지 어렴풋 연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그날 술자리에서는 상품기획실 다섯 명의 여자가 모두 안주감이 되었다. 심지어 미스 박의 풍만한 유방마저 입에 올랐다. 묘하게도 나는 그 이야기에는 별반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야근>
물론 그 사건 이후 두 명의 대리가 이정화 과장에게 무슨 이상한 시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회사 안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얼마간 유심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는 그날 들은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비록 그녀가 이혼녀일지라도 우리 사이는 특별히 변할 것이 없었다.
어쨌든 내가 이정화 과장과 가까워진 계기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날 나는 잔무가 남아 퇴근시간이 넘도록 사무실에 머물러 있었다. 실장이 퇴근하자 주위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그녀는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텅 빈 사무실에는 어느새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나는 한 시간쯤 지나 퇴근을 보고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한데 웬 일인지 조금 전까지 있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과장님…?”“응?”뭔가에 가려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굵은 밴드로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이정화 과장이 등을 돌린 채 의자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해냈다. 마치 재래식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듯한 자세로 그녀는 책상 밑을 열심히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내 시선은 본의 아니게 그녀의 뒷모습을 흘끔거려야 했다. 검은색 치맛자락에 담긴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 만큼 바짝 낮춰져 있었다. 지난 번 대리급들이 화제로 삼은 바로 그 타이트 스커트였다.
묘한 장면이었다. 이정화 과장의 둔부는 정말로 컸다. 단순히 살이 많은 게 아니라 골반 자체가 풍만했다. 게다가 잘록하게 이어진 허리는 그런 한 쌍의 그득한 반구를 유독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한때 유부녀였던 몸매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성싶었다.순간 그녀는 더욱 깊숙하게 상체를 숙였다. 이윽고 나는 보아서는 안될 장면까지 목격하고 말았다. 그녀의 추켜 올라간 치마춤 속에서 언뜻 다른 색깔의 천조각이 드러났다. 여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그녀가 입고 있는 속옷이었다.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어…, 제가 도와 드릴까요?”
도수 높은 뿔테 안경이 나를 쳐다보았다. 새하얀 팬티가 코 앞에서 사라졌다.“컴퓨터가 이상해. 라인 연결이 잘못된 걸까?”나는 그녀가 비켜 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살펴보았다. 하드웨어의 문제라기보다는 단순한 시스템 오류였다. 고치는 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손쉽게 정리를 마친 내가 물었다.
“다른 것도 도와 드릴까요?”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줄 수 있어?”결국 우리는 한 시간쯤 더 사무실에 남았다. 꽤 복잡한 서류 작업이었다. 일이 끝나자 이정화 과장은 나에게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고마워. 덕분에 금방 끝났네.”“과장님 혼자 하시니까 그렇죠. 저한테 말씀하셔도 됐을걸.”“후훗, 앞으로는 그럴게. 근데…. 어쩌지? 아직 저녁 전일 텐데.”“괜찮습니다. 별로 배는 안고파요.”나는 점잖게 사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제안을 꺼냈다.“그럼 나갈래? 내가 한잔 살 테니.”한잔, 그리하여 우리는 처음으로 단 둘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여기 와 본 적 있어?”“아뇨. 처음입니다.”나는 생소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정화 과장이 데려간 곳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어느 빌딩의 지하 바(bar)였다. 우리가 자리를 잡자 바텐더가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서로 아는 눈치인 듯했다.“과장님은 단골이세요?”“그냥 어쩌다 혼자서 오는 곳이야. 가끔 독한 술이 생각날 때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혼자 독한 술을 마시는 곳이라. 이혼녀 여(女)과장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었다.“뭘 마실까? 브랜디(brandy)?”내가 멋쩍게 반문했다.“그건 위스키 종류인가요?”“위스키…? 아니. 브랜디는 과일 주정을 증류시킨 거고, 위스키는 곡물 쪽이지. 맥주랑 와인의 차이하고 비슷해. 우리나라 사람이야 무조건 양주라고 부르지만.”
그런가. 퍽 익숙하게 설명하는 그녀였다. 그걸로 마셔 봐, 그녀가 말했다. 잠시 후 우리 앞에는 두 잔의 술이 놓여졌다. 짤막한 받침이 달린 둥근 글라스에 갈색 양주가 담겨 있었다.“과장님은 술에 대해 잘 아시네요.”나는 그녀를 치켜세웠다. 약간은 낯선 탓이었다. 직장상사, 그것도 여자 상사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신다는 게 어쩐지 어색했다.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그렇지도 않아. 자주 마시다 보면 아는 거니까.”글쎄다. 자주라는 말이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아무튼 오늘 신세졌어. 까딱하면 집에까지 가져가야 했을 텐데.”“뭘요, 별것도 아닌걸요.”
내가 호기롭게 대꾸하자 이정화 과장은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다음부터 종종 당신을 부려먹을까?”당신-농담조였으나 분명 그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얼결에 나도 마주 웃어 보였다.
“네. 그러세요, 과장님.”그때부터 우리의 대화는 좀 더 수월해졌다. 딱딱한 인상과 달리 이정화 과장의 성격은 대하기가 편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적당할 만큼만 술을 마셨다. 아무도 취하지 않은 대신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했다. 그날 술집을 나서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이제부터는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돼.”“선배님이요?”
“응. 어차피 당신이 후배잖아? 과장님이란 호칭은 빼.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만 말이야.”“아…. 네, 선배님.”그것은 그녀가 나한테 최초로 보여 준 호감이었다.
<미스 박>
실상 그 무렵만 해도 나는 이정화 그녀에게 별다르게 관심-당연히 여자로서의-을 갖지는 않았다. 여전히 미스 박과 어정쩡한 사이로 남아 있는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어느날 이상한 사건으로 인해 곧 깨어질 운명이었다. 첫 술자리 이후 나와 이정화 과장은 진짜로 단 둘이 야근을 하는 경우가 늘어 갔다. 무슨 거창한 일거리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정식으로 후배가 된 내가 편해서였겠지만, 그저 잔손길이 필요한 때에도 그녀는 나를 찾고는 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는 그녀가 가끔씩 저녁식사나 술을 샀다. 나는 그러면서 차츰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딱 두 가지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을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혼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는 미스 박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문제의 그날도 우리는 함께 야근을 마치고 저녁을 먹었다. 내가 휴대폰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막 식당 문을 나서면서였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도 잊고 온 물건이 있다며 뒤따르고 있었다.그 사이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챙긴 뒤 아무 생각없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이정화 과장이 갑자기 내 손목을 붙들었다.
“왜요, 선배님?”
그녀가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조용히 하라는 그 표현과 동시에 내 시선은 그녀의 턱이 가리킨 방향을 향했다.기이하게도 실장실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설마 실장님이 아직도 퇴근 전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한데 두런대는 목소리가 들려 오더니 이내 누군가가 바깥으로 나왔다.어라-하마터면 나는 아는 척을 할 뻔했다. 미스 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정화 과장이 먼저 나를 제지했다. 왜 다행인지는 다음 순간 알아차렸다.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실장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 묘한 의구심을 품었다. 집에서 갈아입기라도 한 듯 미스 박은 옷차림이 낮과는 달라져 있었고, 실장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뭐라 나지막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니 미스 박은 아예 손으로 눈가마저 훔치는 중이었다.
그들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소리를 냈다. 이정화 과장은 여전히 내 옷소매를 쥐고 있었다.“방금…, 방금 뭐였죠?”“몰라도 돼.”얼굴을 찡그린 그녀가 짧게 대꾸했다.“실장님하고 미스 박 아니었어요?”“아니야. 그냥 못본 걸로 해. 나중에 설명해 줄게.”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거듭 물어도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