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실장실 앞에서 목격했던 그 묘한 장면에 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던 이정화 과장조차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다음날부터 벌어진 기이한 사건들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지만, 기실 나로서는 당시에 그녀와 함께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말리지 않아 내가 멋모르고 실장과 미스 박 사이에 끼어들었다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을지도 몰랐다.
미스 박은 그날 이후 출근을 하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병가를 냈다고 했으나 나는 믿지 못했다. 하루 전 보았던 그녀는 전혀 아픈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장은, 무슨 영문에선지 한동안은 출근해서도 사무실을 비우고 있었다.
전말은 일주일 후에 밝혀졌다. 우연히 컴퓨터로 사내 망(網)에 접속했던 나는 공지사항 하나가 띄워진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사번○○○, 상품기획실 소속 박○○, 발령 그룹본부 비서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름 아닌 미스 박의 인사발령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와의 데이트에 연연하고 있던 나에게는 퍽 당혹스러운 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착잡해진 나는 담배라도 피워물기 위해 흡연실로 향했다가 같은 팀의 대리들과 마주쳤다. A와 B대리, 내가 다가가자 흠칫 놀랐던 그들은 이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대화를 잇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대?” “어떻게 됐겠어? 실장 부인이 당장 그 계집애 자취방에 들이닥쳤지. 거기에서 정통으로 걸려 버린 거야.” 실장 부인과 그 계집애라. 나는 그 의외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내 표정을 알아챈 양 A대리가 수군거렸다.
“한바탕 난리를 쳤다더군. 때마침 실장이랑 막 옷 벗고 뒹굴려는 찰라에 당했다던걸.” “크크크, 볼만했겠네?” “누가 아니래. 알고 보니까 미스 박, 그년이 살던 아파트 보증금도 실장이 대 준 거라던데.” 미스 박? 순간 나는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 한 마디가 전후사정을 완벽히 드러내고 있었다. 실장이 늦은 밤 사무실을 찾았던 이유, 미스 박의 울먹이던 표정과 부스스하던 옷차림, 더없이 심각했던 두 사람-기가 막혔다. 모두가 한 코에 꿰어지듯 분명해졌다.B대리가 입맛을 다시며 푸념했다.
“하여간 좋았겠어. 그래도 명색이 우리 부서 퀸카였는데 그런 쭉쭉빵빵 몸매를 혼자서 실컷 주물렀다는 것 아냐? 실장도 그 나이에 정말 대단해. 1년이 넘도록 아무도 몰랐잖아?”“맞아. 부럽더라. 좌우간 미스 박이야 잘됐지. 단물 쪽쪽 빨아먹고 나서 그룹 본사까지 올라갔으니까.”
두 사람은 내 쪽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나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표정관리부터 급급해야 했다.잠시 키들거리던 그들은 이윽고 웃음을 멈췄다. 헛기침을 한 A대리가 B대리의 옆구리를 찔렀다. 흘끔 돌아보니 복도 저편에서 이정화 과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문득 그녀와 나의 눈길이 마주쳤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대리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 #2>
소문은 금방 퍼져 갔다. 심지어 오후쯤에는 부서 내의 다른 여직원들도 여기저기에서 쑥덕거리고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미스 박은 중년의 실장과 남몰래 불륜 관계를 지속해 왔었고, 엿들은 것처럼 대가로 물질적인 후원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다 마침내 사모에게 들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정도 선에서 마감되리라는 것이었다.
실장은-어쨌든 이사급이었고 상품기획실은 회사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서니까-자신의 파워를 이용해 미스 박을 다른 곳으로 전출시키는 차원에서 입막음을 할 모양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았다. 업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일어서기도 싫을 만큼 기분이 우울한 때문이었다. 그렇게 홀로 앉아 있을 무렵 누군가가 어깨를 짚었다. 이정화 과장이 서 있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와. 술 한잔 하게.” 나는 그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녀의 단골 바에 들렀다. “아니, 보틀(bottle)로 줘요.” 그녀는 웨이터에게 병째로 위스키를 주문하고 있었다. “선배님이 사시는 건가요?”
내가 묻자 이정화 과장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흘렀다. 뭐라 입을 열어야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녀가 잠시 뒤 조용한 목소리를 꺼냈다. “당신…, 미스 박이랑 사귀고 있었지?” “네?” 나는 당황했다. “둘러대지 않아도 돼. 다 알고 있으니까.” “어, 어떻게 그걸…?” “남자라면 몰라도 여자는 알아. 직감이라는 게 있거든. 처음부터는 아니겠지만 오래전부터 눈치는 챘었어.”
바텐더가 큼지막한 술병을 가져 왔다. 그녀가 술을 따라 주었다. 자신은 온더 락(on the rock), 나에게는 스트레이트였다. “그날은 그래서 당신을 말렸던 거야.” “그럼 설마…, 실장님과 미스 박의 관계도 알고 계셨어요?” “응. 그쪽은 좀 더 오래 됐지. 하지만 나 빼고는 아무도 몰랐을 거야. 미안해, 솔직히 나는 당신하고 미스 박이 잘되기를 기대했었어. 그렇게 되면 그 여자애가 알아서 정리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놀라웠다. 이를테면 위로주인 셈일까.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위스키를 넘겼다. 독했다.“기분은 괜찮아?” 당연히 아니었다. 고개를 젓자 그녀도 묵묵히 술잔을 입에 가져 갔다. “배신감 느껴?” “선배님에게 말인가요?” “글쎄…, 나든 미스 박 쪽이든.” “모르겠어요.”
나는 짧게 대꾸하며 자작으로 잔을 채웠다.“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어요.” “그래. 오늘은 내가 대신 상대해 줄게.” 대신-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우울하게 들려 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정화 그녀가 더 이상 누구의 ‘대신’이 아니게 되리란 것을, 우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은 바로 그 술자리였다.
▲ 그림 최경태 | ||
자신의 말처럼 이정화 과장은 그날 저녁 내내 나의 술 상대가 되어 주었다. 위스키를 대여섯 잔쯤 홀짝이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나를 비웃었던 것 같아요. 미스 박 입장에서는 우스웠겠죠. 아파트에다 용돈까지 대 주는 남자가 뻔히 있는데,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저 같은 놈이 집적거렸으니.” “과연 그럴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내가 되물었다. “왜요?” “내가 보기엔 당신이 그 여자를 멸시하는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몰라요. 저만 한심한 거죠. 결국 돈 때문에 몸까지 파는 계집애를 좋아했던 셈이잖아요? 사실 그런 여자를 만난 건 처음이에요. 걸레 같은 애들을 사귄 적은 있었지만.”
거친 표현이 튀어나왔다.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어느새 취해 있었다. 그러나 이정화 과장은 그다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 그럼 전에는 어떤 아가씨들을 사귀었지?” “듣고 싶으세요?” “그냥. 당신이 얘기하고 싶다면.”
아마 내가 그녀에게 과거의 여자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그 자리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나는 꽤 장황히 투덜거렸던 것 같다.
우리는 한 시간 가량 더 지나 바를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엔 위스키 한 병이 완전히 비워져 있었고, 그중의 3분의 2 이상은 내가 마신 것이었다. 적잖은 양이었다. 내 발걸음이 비틀거리자 그녀가 슬그머니 팔을 붙들었다.
“아무튼 여자는 다 똑같아요.” “아니, 그렇지 않아.” 이정화 과장의 말투는 또박또박했다. 선배님만은 아니라는 건가요-라고 투덜대려던 나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몸매를 곁눈질했다. 그녀 역시 여자임을 상기시켜 주려는 듯 끼워진 팔짱 위로 상당한 부피의 가슴이 얹혀져 있었다.
나는 야릇한 생각을 떠올리다 말고 씁쓸히 머리를 흔들었다. 도수 높은 안경과 염색기 없는 생머리가 상상을 방해했다. 찰라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우리 다른 곳에 갈까요?” “다른 곳? 2차?”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녀였으나 왠지 대답하기 힘들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분명 술집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데가 아니라….” 말꼬리가 흐려졌다. 내가 시선을 피하자 이정화 과장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우두커니 선 채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오.” 나는 재빨리 정색을 해댔다. “어차피 선배님은 이혼하셨으니까 혼자시고…. 그러니까….” 젠장할, 꼬인 혀가 멋대로 지껄였다. 실수였다.
우리는 다시금 어색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수십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침착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 왔다. “혹시…. 당신 미스 박하고도 잤었어?”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녀가 어째서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문을 잃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당신 취했군. 기억해 둬. 나는 당신 직속상사야.” 이정화 과장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잠깐이나마 닿아 있던 풍만한 유방의 감촉도 동시에 떠나갔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