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왔어.”
김형진이 사흘 만에 자기 집에 들어섰을 때, 아내는 자정이 넘은 시각인데도 홀로 주방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직접 열쇠로 문을 열었다. 미영은 남편을 보고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잠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찻잔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가 안방에서 옷가지를 벗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침대 위에 던져진 남편의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그랬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이십몇 평의 아파트 안은 그래서 더 휑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형진은 와이셔츠를 벗으며 미영의 눈치를 살폈다.
아내는 핫팬츠 위에 착 달라붙는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스물일곱의 무르익은 나이를 증명하듯 미끈하게 뻗은 허벅지와 불룩한 젖가슴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가슴께에는 결혼기념일에 선물했던 금 목걸이가 가늘게 반짝이고 있었다.
“별일 없었어?”
“네.”
남편이 하는 말은 항상 그것뿐이었다. 박미영은 옷가지를 챙겨든 뒤 도로 방을 나왔다. 그가 식사를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자신도 차 한 잔으로 저녁을 때우는 탓이었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홍차에 우유를 넣어서 마셨는데, 형진은 그런 스타일을 겉멋이라고 불렀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 왔다. 뜨거운 물에 푹 담갔으면, 형진은 샤워기 아래에 서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욕조를 채우기도 귀찮을 만큼 녹초였다. 게다가 아내는 집 안에서 목욕하는 것을 노인네 같다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미영과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다. 필경 그녀는 골이 나 있으리라. 지난 삼 주 동안 그들은 동침한 적이 없었다. 연이은 출장과 출장 사이마다 끼어 있는 술자리 때문이었다.
결혼한 지 어느덧 3년 반-따지고 보면 그들 사이에 아이가 없는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김형진은 애초부터 홀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결혼을 서둘렀다. 30년 넘게 혼자 살았던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로서 그에게 줄기차게 결혼을 강요했다.
중매로 만난 그들 부부는 석 달 만에 식을 올렸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어울렸다. 조건도 적당했고, 시기도 적당했고, 점쟁이를 찾아가 궁합 따위를 보지는 않았어도 하여간 그랬다. 그러나 그 적당함이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가 없이 자라났던 것이다. 아내의 아버지는 그녀가 사춘기였던 시절에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요컨대 그는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반면 아내는 장차 자신이 낳을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아버지를 강하게 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형진의 어머니는 외아들이 가정을 꾸리고 반 년이 지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빌어먹을.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리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여자로서도 그리 행복하지 못했었다. 단 한 가지, 그가 죽도록 떠올리기 싫은 기억만을 뺀다면. 어머니를 떠올릴 순간마다 형진은 괴로웠다.
<#30>
“아….”
어둠 속에서 아내의 뭄뚱아리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출산 경험이 없는 스물일곱의 여체는 처녀의 그것처럼 탄력이 있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이는 동안 침대보가 켜를 그리며 헝클어져 갔다. 흥분한 상태가 분명했어도 아내는 남편을 끌어안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신음소리조차 불경스럽다는 양 그녀는 벌어지는 입술을 애써 손등으로 막고 있었다. 그녀의 나머지 한 손은 이불더미만을 애타게 움켜쥐고 있었다.
▲ 그림 최경태 | ||
차츰 숨이 가빠졌다. 형진은 팔을 뻗어 아내의 허벅지를 어깨 위에 메었다. 그의 상체 아래에서 꼿꼿해진 두 개의 젖무덤이 출렁거렸다. 그 한 쌍의 계곡 사이에 늘어뜨려진 금목걸이가 덩달아 리드미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조금만 더, 제발-미영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흘릴 수 없었다.
결코 길지 않은 항해가 거기에서 멈추려 하는 까닭이었다. 허공에 치켜올린 종아리가 안타깝게 경련해댔다. 남편의 몸이 그녀의 몸 속에서 떨기 시작했다. 미영의 입에서 불만족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간단한 체위 변화조차 없이 그의 밑에 깔려 있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늘 한 발짝 못미쳐 모든 동작이 멈춰졌다.
형진이 보기에 아내는 오르가슴의 순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교성을 지르거나 바들거리며 굳어지는 버릇 대신 오직 짤막한 탄성이 전부인 듯했다. 어쨌든 그녀는 정숙한 유부녀였다. 그는 지금 정말로 피곤했다. 남편은 이내 그녀 곁에 널브러졌다. 미영은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십여 분쯤 걸린 그 의무적인 행위 내내 그들 부부는 단 한 번도 입을 맞추지 않았다. 화장지를 뽑아든 그녀는 조용히 욕실로 향했다. 그녀가 몸을 씻고 돌아왔을 즈음 형진은 이미 코를 골고 있었다.
<#31>
그는 ‘사장실’이라 씌어진 문을 통과했다. 검은 색 정장을 입은 젊은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의바르게 허리를 굽혀 왔다. 그가 하나의 문을 더 지나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와이셔츠 차림의 상대방은 호화스런 마호가니 책상에 다리를 걸친 채 전화 통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낮이었으나 그리 바쁜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디? 에이, 아니지. 거기는 잔디가 별로야. 그쪽보다는 지난주에 갔던 필드가 더 낫지 않아? 알았어. 아무튼 부킹은 해놓을게.”
그는 상대방 남자를 기다리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이기는 해도 그곳은 그에게 익숙한 장소 중의 하나였다. 커다란 사무실의 한쪽 켠에는 골프가방과 퍼팅(putting) 연습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표이사라는 명패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지만 그 주인의 얼굴은 잘해야 삼십대 초반가량이었다.
“야…. 오랜만이다, 짜식!”
남자가 팔을 벌리며 다가오자 그들은 서로 어깨를 두드렸다. 제법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이제 그의 몸에는 낡아빠진 운동복 대신 명품 은색 양복이 둘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공부 끝나려면 멀었을 텐데?”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씨익 웃어 보이기만 했다. 상대방은 능글맞게 눈을 찡그렸다.
“설마 너 또 도망쳐 나온 거냐?”
“그냥 잠시 머리나 식히려고요. 형.”
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형이라 불린 남자는 말 안해도 안다는 양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은? 물론 아버님도 모르시는 거겠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못말리겠구나. 너란 놈은. 이봐, 여기 마실 것 좀 가져와.”
기다리고 있던 여비서가 들어왔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는 사이 그의 시선은 발가벗기듯 그녀를 아래 위로 훑었다. 새하얀 블라우스가 거의 젖가슴 한가운데까지 깊숙이 파여 있었다. 그는 돌아서는 여자의 뒷모습도 노골적으로 좇았다. 꽉 끼는 검은 색 미니스커트 안에서 한껏 갈라진 엉덩이가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처럼 씰룩이고 있었다. 상대방이 키들거렸다. 그러나 그가 먹이감에 군침을 삼키는 야수의 눈빛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웃음이었다.
“녀석, 꽤나 굶었나 보군. 그래도 소용없다. 다음 달에 잘라 버릴 계집애거든. 지난 주에 따먹어 봤는데 영 아니었어. 한 십만 번은 뛴 걸레더라구.” 그는 말을 아꼈다. 벌레는 벌레일 뿐이었다.
“형도 여전하군요.”
“임마. 그럼 그 재미라도 없으면 어쩌냐? 아버지 자리 때우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아버지. 그들은 동시에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것이 그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이유였다. 상대방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재벌기업의 2세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지닌 권력과 부(富)를 서로 존중하고 있었다. 남자가 본론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엔 뭐야? 뭐가 필요해?” 그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차요.”
“차? 니 건 어쩌구? 참, 아버님이 모른다고 하셨지.”
망설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남자 쪽이 다시 인터폰을 켜고 말했다.
“이봐. 주차장에 있는 내 차 좀 준비해 놔. 기사는 없어도 돼. 키만 올려 보내.”
간단했다. 용건을 마친 그가 일어서려 하자 상대방은 선뜻 지갑을 뒤적였다.
“이거 받아라. 차가 있으면 기름값도 있어야 할 테니까.”
그는 남자가 건넨 것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었다. 하얀 종이쪽 몇 장,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안에 적힌 0은 다섯 개가 아닌 여섯 개일 터였다.
“시간 나면 언제 술이나 마시러 가자. 대신 조용히 놀다 들어가. 괜히 나까지 욕먹게 만들면 안돼. 알았지, 오광태?”
그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오광태-국회의원 오현성의 아들인 그의 이름은 오광태였다. 밖으로 나온 그에게 까만 미니스커트의 여자가 공손히 자동차 열쇠를 바쳤다. 오광태는 빌딩 앞에 세워진 스포츠카에 그 열쇠를 꽂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