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적어도 아침까지는.
집을 나선 김형진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 부부의 자가용은 직장인 학교까지 거리가 먼 편인 아내 미영이 주로 몰았고, 그는 보통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아내는 이미 삼십여 분 전에 출근한 뒤였다.
남자들, 정확히 두 명의 사내는 그가 아파트 입구를 돌아설 무렵에 나타났다. 처음에 형진은 그들이 우연히 어깨를 부딪친 정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김형진 기자님이시죠?”
그들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회색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30대의 남자였다.
“어…, 네. 그렇습니다만?”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저희와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예?”
형진은 의아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등 뒤에서 또 한 명이 다가섰다. 비슷한 양복 차림이었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그보다도 목 하나는 더 큰 사내였다.
“무, 무슨 일인데 그러시죠?”
뒤쪽 남자를 돌아본 형진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회색 양복 쪽이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는 김 기자님을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어느 분이 김 기자님을 잠깐 뵙고 싶어하십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잡지사에도 미리 연락을 해놓았고요.”
형진의 눈이 멍하니 껌뻑였다. 등 뒤의 사내가 행인들이 눈치채지 못 하도록 바짝 몸을 밀착시켜 왔다. 강압적은 아니었어도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 그림 최경태 | ||
형진은 차창 밖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그를 태운 자동차는 강북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덩치 큰 사내가 운전중이었고 그는 회색 양복의 남자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무슨 영화에나 나올 법한 납치 장면 따위는 아니었다. 눈을 가리거나 트렁크에 갇히지도 않았다. 남자들은 꽤 예의바르게 굴고 있었다. 형진이 재차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제가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죄송합니다. 가 보시면 알게 됩니다.”
함구령이라도 받은 듯 그들은 짧은 대꾸만을 돌렸다. 차가 큰길을 벗어나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형진은 그곳이 강북에서도 유명한 고급 주택가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윽고 자동차는 어느 화려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폐쇄 회로 카메라가 달린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회색 양복이 말했다.
“여깁니다. 들어가시죠.”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향한 형진과 남자들은 커다란 거실로 들어갔다. 푹신한 양탄자가 깔린 그 방의 내부는 장식용 서가와 가죽 소파로 으리으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형진은 내심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후 맞은 편 방문이 열리자 그는 은연중에 긴장했다.
하지만 문에서 나타난 사람은 의외로 검은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와 휠체어에 탄 한복 차림의 노인이었다. 그 두 사람이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그를 데려왔던 사내들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밖으로 나갔다. 등 뒤로 육중하게 문이 닫혔다.
“안녕하시오…. 김형진 기자.”
느릿느릿하고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손짓하고 있었다.
“누구시죠? 저를 아십니까?”
“알고 있소. 아주 잘 알고 있지.”
콜록콜록, 기침소리가 이어졌다. 뒤에 선 중년이 나서려 했으나 노인이 제지했다. 노인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지만 묘한 기품이 있어 보였다.
“먼저 내 소개부터 하겠소. 나는 황연택이라고 하는 사람이오.”
황연택이라….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어쨌든 무례를 범했구만. 용서해 주시오. 이 늙은이가 김 기자를 모셔 오라고 한 것은 그저 궁금한 게 있어서였소.”
노인이 천천히 말했다.
“이번에…. 김 기자가 쓴 기사에 대해서 말이오.”
이번 기사? 이성귀에 관한 이야기인가? 한낱 가십성 기사와 점잖은 인상의 노신사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형진으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다음 순간 어렴풋 뭔가를 기억해낸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연택 회장-P그룹의 창업주인 동시에 전 한국원로경영인협회 회장. 비로소 그의 기사와 상대방의 관계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랬다. 노인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외동딸은 다름 아닌 이성귀, 바로 그 30여 년 전 희대의 색마였던 이성귀의 희생양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뜻밖의 만남이었다. 형진은 그제야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허허허, 이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구려.”
황연택 회장이 조용한 미소를 흘렸다.
<#48>
“어머머, 정말이니? 너희 남편이 어젯밤 정말 그랬어?”
“으…, 응.”
박미영은 수화기를 가리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누가 듣는다면 낯을 붉힐 이야기임에도 건너편 목소리는 호들갑스럽기만 했다.
“어머머. 뻔하다, 얘. 이제는 진짜 의심해 봐야 돼. 너도 알지? 그럴 때 남자들은 십중팔구 딴 데서 흥분하고 온 거라구. 딴 년들한테 배운 걸지도 모른단 말이야.”
“하, 하지만….”
그녀는 흘끔 전화기 너머를 두리번거렸다. 한낮의 교무실 안은 늘 그렇듯 번잡했다. 친구가 떠들어댔다.
“됐어, 기집애야. 그러니 내가 뭐랬어? 미리 점이라도 보자고 했잖아.”
“꼭 그래야 되는 걸까?”
“걱정마. 그게 무슨 상관이니? 당장 바람피우러 가자는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난 그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걸.”
“글쎄 상관없다니까. 점이야 맞으면 됐고 틀리면 마는 거 아냐? 솔직히 말해 봐. 미영이 너 그렇게 안심할 수 있어?”
미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지난 밤 까닭없이 흥분하던 남편 형진의 모습이 또렷하게 스쳐 갔다.
“조심해. 그게 다 잘못되고 있는 조짐이야. 나도 그렇게 우리 남편한테 당한 거라구. 그래도 나는 맞바람이라도 피지만 넌 아직 애인 하나도 없잖아?”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를 연신 부추기고 있는 것은 엊그제 만난 유부녀 친구였다. 홧김에 애인과 호텔까지 들락였다고 당당히 떠들어댔던 그 친구의 말투에는 은근히 자랑마저 섞여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가보자. 이따 수업 끝나고 만나.”
결국 미영은 유혹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맥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았어. 그럼…, 니 말대로 할게.”
“그래. 생각 잘한 거야.”
통화를 마친 그녀는 다시 한 번 주위를 흘끔거렸다. 교무실 저편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언젠가처럼 남학생 몇 명이 끌려온 것 같았다.
“자기네 담임 선생님 치맛속을 훔쳐봤답니다. 저 놈들이.”
흠칫 놀란 미영은 어깨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옆 반 유부남 선생-여전히 그녀에게 추근덕거리는 작자-이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 남자 선생은 능글맞게 키들거리는 표정이었다.
“세 놈이 한꺼번에 엎드리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들켰다네요. 다른 여선생도 아니고 노처녀 담임한테 말이죠.”
글쎄다. 그의 말은 노처녀가 아닌 다른 여교사라면 얼마든 치맛속을 들여다봐도 괜찮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제야 자신도 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긴 미영은 무의식중에 벌어져 있던 허벅지를 슬그머니 오므렸다. 마치 책상 아래에 눈이 달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저런 남학생들 중 누군가는 그녀도 모르는 새 그녀의 속옷 색깔까지 꿰뚫고 있을지도 몰랐다. 왠지 모르게 귀밑이 달아올랐다. 스타킹에 감싸인 살결들이 스커트 속에서 미끌거리며 마찰하고 있었다.
<#49>
“실례지만 회장님, 제게 무엇을…?”
침착함을 되찾은 형진이 노인에게 물었다. 이제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황연택 회장이 마주보고 있었지만 검은 양복의 중년은 여전히 꼿꼿하게 휠체어 뒤에 서 있었다.
“별건 아니오. 그저 노인네가 죽을 때가 가까워서 궁금증이 많아진 게지.”
“어쨌든 제가 아는 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그렇다면 우선…, 이성귀 그 친구에 대해서 묻고 싶구려. 그가 죽었다는 게 확실하던가요?”
“예. 사실입니다. 병원에서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요? 미안하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요. 그 얘기는 들으셨소?”
“이성귀의 사인 말씀이십니까? 잘 아시다시피 자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탈출하려다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발견되었을 때엔 익사체였다고 합니다.”
형진은 되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나 황연택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자살…. 자살이라. 아무래도 그런 식이 됐었겠지.”
콜록이는 기침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차 형진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어쩐지 뻔히 알면서도 던지는 질문인 듯했다. 황연택은 한때 재계 몇 순위 안에 들던 인물이었다. 그만큼의 권력과 재력을 쥐고 외동딸을 농락당했던 그가 이성귀의 최후에 대해 모를 리는 결코 없었다.
“혹시 따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회장님?”
호사가의 호기심 또는 복수심 때문이리라, 형진은 생각했다.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던 노인이 말했다.
“내 딸년…. 후후. 그럴 수도 있겠군. 김 기자, 혹시 김 기자는 내 딸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오?”
“죄송하지만 잘 모릅니다.”
침묵이 흘렀다. 이야기를 멈췄던 황연택 회장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허허로운 음성을 끄집어냈다.
“그 아이도 죽었소. 이렇게 애비만 남겨두고. 아주 오래된 일이구려. 벌써 30년도 더 되었을 게야. 아마도….”
“35년째입니다, 회장님.” 검은 양복의 사내가 공손히 토를 달았다. 노인은 옛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고통스럽게 이마를 찌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