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이라고 하셨습니까, 회장님? 그렇다면 혹시…?”
휠체어 위의 노인을 바라보는 김형진의 이마에도 굵은 주름이 그어졌다. 황연택 회장이 대답했다.
“그렇다오. 딸아이는 이성귀를 만난 뒤로, 아니 이성귀에게 몸을 준 뒤로 차츰 폐인이 되어 갔지. 차라리 짐승처럼 변해 갔다고나 할까…. 사라졌던 그 애를 다시 찾아냈을 때엔 사창가에서 몸을 팔고 있었소. 그것도 자기가 자청해서 그랬다더군. 명문 여대를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온 애가 창녀 신세로 전락했던 게야…. 왜 그렇게 됐는지 아시겠소, 김 기자?”
형진은 침묵을 지켰다. 실제 모르기도 했지만 차마 입을 열기 힘들었다.
“내 딸은 그곳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소. 그러면서 아무에게도 만족하지 못한 채 오직 이성귀 그 놈만을 끝없이 그리워하고 있었소. 그래요…. 그 놈이 잡힌 이후에도 사내 맛을 잊지 못해 그렇게 됐던 거라오.”
색광증-찰라 그 단어를 떠올린 형진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져 갔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 동시에 엄청난 미스터리였다. 사실일까? 단지 남자의 물건 하나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미쳐 버릴 수도 있는 것일까? 황연택 회장의 늙은 눈동자는 아련히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결국 나로서는 그 애를 집에 가둬 놓을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아이는 스스로 목을 매어 버렸지….”
일순 형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궁도(宮島)에서 보았던 강 마담의 목 매달린 시체가 상기된 탓이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내 딸년과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마음 속에서 지워 버린 채 살았소. 아예 생각조차 않으려고 노력했지. 그런데 35년이나 지난 지금에 다시 그 일이 떠오른 거요. 김 기자 덕분에 말이야. 나도 엊그제 그 기사를 읽었소.”
“죄, 죄송합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묵묵히 고개를 조아리는 것뿐이었다. 한복 차림의 노인은 손을 저었다.
“아니야. 나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말이 그렇지 솔직히 이 늙은이는 그 일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소. 애써 잊고 있는 척했을 뿐이라오. 겨우 이제야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 게지.”
두 사람 사이에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마치 노인이 아닌 형진이 이야기를 들으러 이곳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점점 더 복잡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황연택 회장에게 되물을 수 없었다. 뒤쪽의 중년 사내가 문득 끼어들었다.
“회장님, 말씀 중에 송구하지만 투약하실 시간입니다.”
“알았네. 정 비서.”
그 말은 그들의 만남이 끝났다는 통보였다. 형진은 몸을 일으켰다. 정 비서라 불린 검은 양복의 남자가 그를 문가까지 배웅했다. 콜록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김 기자. 다시 만날 수 있겠소? 나중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구려.”
“예, 회장님.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형진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돌아섰다. 바깥에는 회색 양복의 사내가 차에 탄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황연택은 창가의 커튼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곁에 서 있던 장 비서가 나지막히 말했다.
“김형진 저 친구는 회장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황연택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글쎄…, 나도 모르겠네.”
“사실대로 알려 주는 게 옳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 사람에게는 자신의 부모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그렇겠지.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일세, 장 비서.”
▲ 그림 최경태 | ||
소매춤에 손을 집어넣은 황연택 회장이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아주 오래된, 빛바랜 사진이었다. 노인은 침울한 눈길로 사진 속에 찍힌 두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중 하나는 바로 그의 딸이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그때 장 비서가 조용히 휠체어를 돌렸다. 방 안으로 약병을 든 간호사가 들어왔다.
<#51>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 문이 열렸다. 두 여자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조그마한 방 안에는 한쪽 벽을 따라 민화(民畵)가 그려진 병풍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는 옻칠을 한 조그만 반상이 놓여 있었다. 탁자 너머에는 다소 요란한 색상의 한복을 입은 중년 여자가 지긋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한 구석에서는 마치 그래야만 분위기에 어울린다는 양 한 줄기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박미영은 친구가 시키는 대로 여자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방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이었다. 그녀들이 찾은 곳은 변두리의 어느 허름한 한옥집이었다. 그곳이 친구가 말했던 용하다는 점(占)집이었다.
점쟁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중년 여자는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그녀들을 쏘아보더니 불쑥 욕지거리부터 내뱉었다.
“쌍년들…. 또 남편 똥구멍이나 들여다보려고 왔구먼?”
미영이 뜨금한 표정을 지었다. 나란히 앉은 친구가 살살거리는 웃음기로 대꾸했다.
“아유, 선생님도 참. 오늘은 제가 아니에요. 이 친구가 궁금하다길래 온 거에요.”
“이년이나 저년이나 그게 그거지. 그래서 너는 지난번에 다리 벌려준 애인이란 사내놈하고는 열심히 교미(交尾)중이냐?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서방은 따로 있어도 그 놈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니 사타구니 주인이니까.”
“그럼요. 호호호.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착실하게 몸보신시키고 있어요.”
친구는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미영의 눈치를 살폈다. 생소하고도 민망한 이야기에 미영은 말문을 잃고 있었다. 그러자 점쟁이가 대뜸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넌 뭐해? 남편 똥구멍 보러 왔으면 얼른 준비해온 것부터 꺼내야 할 것 아니야?”
“네?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거린 미영은 허둥지둥 핸드백을 뒤져 미리 가져 간 종이쪽을 내밀었다. 남편 김형진과 자신의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였다. 그것을 건네받은 중년 여자는 뭐라 중얼중얼거리며 손가락을 꼽아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니 년은 관상만 봐도 남편 거시기가 부실한 걸 알겠다. 제대로 된 남자랑 한바탕 뒹굴어 보고 싶지? 너도 니 친구 년처럼 물건 서방 하나 점지해 주랴?”
미영은 아무런 반박도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점쟁이의 목소리가 은근히 낮아졌다.
“흐음, 이건 아무래도 흔한 팔자들이 아닌데…?”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어이쿠-갑자기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너, 너…. 니가 박미영이란 년이야? 남편 이름이 김형진 맞고?”
미영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똑같이 소스라치는 낯빛이 된 중년 여자가 새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세상에, 이건 살(煞)이야, 살!”
“살이요?”
당황한 미영은 점쟁이와 친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를 대신해 옆에 앉은 친구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게 무슨 얘기예요, 선생님? 왜요?”
“나도 이런 운은 처음이야. 박미영 니 년 남편한테 마(魔)가 끼었어. 너는 저 친구 년보다 훨씬 더 독해! 남편 때문에 니 가랑이가 썩어들어 갈 팔자야…!”
네에? 두 여자의 입이 동시에 떨떠름히 벌어져 갔다.
<#52>
“빌어먹을, 이럴 리가 없어!”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동자를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며 그가 소리질렀다. 와장창, 주먹이 박히자 산산조각난 유리 조각들이 세면대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핏방울이 함께 흘러내렸다. 그는 부들거리며 손을 매만졌다.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찮은 고통이었지만 벌레들의 세상에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껴지지 않았던 감각이었다.
오광태는 벌거벗은 채 오피스텔의 욕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깨어진 거울에 비춰지고 있는 자신의 일그러진 물건을 쳐다보았다. 흉측했다. 부끄러운 부분이라서 흉측한 게 아니라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있기에 흉측했다.
그의 하초(下焦)는 어느새 종전의 그것, 다시 말해 외딴 섬 궁도에서 시퍼런 칼날로 내려치기 이전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그 물건은 더 이상 장대하지 않았다. 그저 보통의 남자들이 지닌 보통의 크기와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쿵쿵쿵, 욕실 문이 두들겨지고 있었다. 콧소리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 참, 안나올 거예요? 나 이따가 스케줄 있단 말이에요…!”
여자는 함연주가 아니었다. 함연주가 마련해 준 첫 번째 상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라며 그 여자를 오피스텔에 데려왔다. 그리고 그가 눈짓하자마자 혼자 돌아갔다. 이미 오광태의 권능(權能)에 굴복된 함연주는 그런 취급에도 하등 불만이 없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다음 차례로 실컷 열락을 맛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흥분의 순간은 거기까지에 불과했다. 그가 침대 위에 걸터앉고, 침대 아래에 무릎꿇은 새로운 여자가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을 때-그때 오광태는 변화를 알아차렸다.
여자의 머리채가 분주히 수직으로 오르내렸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예전 물건에서 누릴 수 있었던 만큼조차도 세워지지 못했다. 심지어 침대 위에 드러누운 여자가 코 앞에서 늘씬한 허벅지를 한껏 벌려댔어도 그의 사타구니는 비참함 그대로였다.
상대가 불만족스러워서일 리는 없었다. 함연주가 끌어들인 그 아가씨는 오히려 그녀보다도 훨씬 먹음직한 벌레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여자는 실망하고 말았다. 오광태는 허둥지둥 화장실로 뛰어들어야 했다.
“나랑 하기 싫어요? 쳇, 내가 뭐 아쉬워서 이러는 줄 아나?”
견디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그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어머나! 뭐, 뭐야?”
바깥의 여자가 허둥지둥 기겁을 해댔다. 마찬가지로 벌거벗고 있던 여자의 몸매는 누가 보아도 침을 삼킬 만했다. 함연주의 말로는 미인 대회 출신의 일류 모델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지금 경악을 한 얼굴이었다. 그녀 앞에는 왜소한 몸집의 사내가 한쪽 팔에서 뚝뚝 검붉은 피를 흘리며 서 있을 따름이었다.
“꺼져…! 꺼지라구!”
오광태는 이를 갈며 뇌까렸다. 모델 아가씨는 뒷걸음을 치며 방 안으로 돌아갔다. 피를 닦을 생각도 않은 채 그는 거실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둘러 팬티며 브래지어를 주워 입는 여자의 나신이 보였다.
“벼, 변태 새끼!”
상소리를 지껄인 그녀는 이윽고 십 센티도 넘을 하이힐을 뒤뚱거리며 도망치듯 오피스텔을 빠져나갔다. 또각대는 구두굽 소리만이 뒤에 남겨졌다. 으으으, 오광태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신음소리를 울부짖었다. 그 순간이었다.
‘낄낄낄…. 우히히히…. 낄낄낄낄.’
충혈된 그의 눈동자가 희번덕였다. 그는 더 이상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 목소리였다. 귀신의 환청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