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터뜨렸다. 아내의 새하얀 허벅지가 그의 허리를 단단히 죄어 오고 있었다. 아니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의 둔부에서부터 강한 압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또아리를 틀 듯 꿈틀거리는 미영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낯설었다. 아내는 그가 아는 아내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느즈막히 퇴근한 형진이 샤워를 마치고 안방에 들어섰을 때, 미영은 얇은 슬립 한 장만을 걸친 채 침대맡에 앉아 초조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하루종일 뭔가를 기다려야 했던 사람처럼 불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진은 그제야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문 일이었다. 아내는 한 번도 먼저 요구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섹스를 위해 자기 손으로 속옷을 끌어내린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남편이 형식적인 입맞춤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스스로 팬티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미영의 손톱이 형진의 등을 파고들었다. 천정을 향해 치켜올린 그녀의 발 끝이 꼿꼿하게 펴지며 경련해댔다. 형진은 열심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팔을 뻗어 그의 상체를 와락 끌어당겼다.
▲ 그림 최경태 | ||
“아아, 아…!”
미영은 남편의 몸뚱아리에 올라타자마자 오랫동안 참아 왔다는 양 격한 헐떡임을 토해내고 있었다. 땀에 젖은 두 사람의 살결이 민망한 소음을 울리며 맞부딪쳐 갔다. 요란했다. 침대 전체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얼떨떨해진 형진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애타게 찌푸려진 아내의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왠지 그를 보는 게 아니라 저 너머 다른 곳을 갈구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 아, 아! 그녀의 붉은 입술이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그는 이를 악물었다. 생소한 행위에 생각보다 빨리 끝이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아내도 그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팽팽히 몸을 젖힌 그녀가 외쳤다.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저는 아직, 아직이란 말이에요!”
형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수백 번 정사를 치렀어도 아내는 결코 그런 말을 지껄이지는 않았었다.
“여, 여보…!”
그는 다급한 목소리와 아내의 출렁이는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미영의 바람과 달리 그의 하체에서는 불가항력적인 봇물이 터져나오는 중이었다.
“아, 안돼…. 제발….”
그러나 이미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불만족의 신음을 길게 흘리며 그녀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형진은 가쁜 숨을 헉헉거렸다.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뜩해진 바로 그 찰라 그의 뇌리는 마술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광태, 그건 오광태였어-그는 이마를 짚은 채 멍하니 뇌까렸다.
<#74>
국회의원 오현성. 58세. 전국구 1회, 지역구 2회 당선. 슬하에 1남, 오광태…. 그랬다. 나이트클럽 앞에서 스쳐 갔던 그 얼굴은 바로 오광태였다. 희미하기는 했어도 김형진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왜 지난 밤 그 묘한 시간에 오광태의 이름이 상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게 전부였다. 다음날 낮이었다. 마감이 다가온 잡지사 안이 점차 분주해지고 있었지만 형진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형진은 책상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탤런트 S양과 오광태라, 어렴풋 기이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궁도(宮島)에서 사라졌다던 그가 버젓이 서울시내 한복판에 나타났다는 자체부터가 기이했다. 국회의원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그렇거니와 만난 장소로 보건대 오광태 역시 그 나이트클럽의 회원제 특실 손님임이 분명했다.
혹시 그 친구가 S양과 함께 있었던 남자들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설마? 그때 문득 사무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건너편 자리의 부장이 전화기를 든 채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뭐야, N호텔?”
형진의 귓가가 무심코 그쪽으로 향했다. N호텔은 그가 오광태와 마주쳤던 그 호텔이었다.
“그래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우리나라 첫 번째 재벌집 며느리인데. 그 여자 미스코리아 출신이었지? 좋아, 알았어.”
부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바쁘게 손짓해댔다.
“어이, 누구 당장 N호텔로 나가 봐. 아니 우선 D그룹에 연락해서 취재요청부터 받아 놔!”
“왜요? 무슨 일입니까?”
그의 호들갑에 기자들이 떨떠름히 반문했다.
“사건이 터졌어. 자네들 D그룹 며느리 알지?”
“몇 년 전 미스코리아인가 뭔가였던 여자 말입니까?”
“그래. 그 여자가 폭행 사건을 당했다는 거야.”
“폭행이요? 이혼소송을 벌인다는 소문이 있던데…. 누구처럼 남편한테 당했나 보죠?”
흔한 얘기인 듯했다. 고개를 빼고 있던 형진은 짐짓 모르는 척 눈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엉뚱한 이야기가 들려 왔다.
“낸들 아나. 근데 그 유부녀가 어제 저녁에 N호텔 객실에 투숙했었다는군. 폭행 사건은 그 직후에 터졌고 말이야.”
“예? 그렇다면?”
“뻔하잖아. 유부녀가 남편하고 호텔방에 들락이는 것 봤어? 보나마나 같이 뒹굴던 놈한테 맞았거나, 아니면 딴 놈하고 재미보다가 남편한테 들켜서 얻어터진 거라구.”
기자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진은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탤런트 S양이 정사 도중에 병원에 실려 갔다는 그 나이트클럽 특실에 오광태가 나타났고, 그 나이트클럽이 있는 호텔에서 그를 목격하자마자 이번에는 재벌집 며느리가 정사를 벌이다가 폭행을 당했다-이상한 우연의 일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던 동료기자가 형진의 어깨를 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이거 받아, 김 기자.”
갈색 서류봉투 하나가 건네지고 있었다. 그는 의아한 서선으로 그 봉투를 쳐다보았다.
“어…, 이게 뭔데?”
“나도 모르겠어. 누가 로비에 갖다 놓은 건데, 자네 전해 달라고 했다던걸.”
평범한 모양의 그 서류봉투는 ‘친전(親展), <주간채널> 김형진 기자 앞’이라는 글씨와 함께 입구가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형진은 조심스레 풀칠을 뜯었다. 안에는 꽤 묵직한 두께의 서류철이 담겨 있었다.
“응? 이건…?”
그 종이쪽들을 들여다본 그는 이윽고 유심히 눈살을 찌푸렸다. 서류들은 각 장마다 인물사진과 함께 무슨 인사서류처럼 개인기록들이 길게 덧붙여져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위에 놓인 것은 뜻밖에도 황연택 회장이었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는 형진이 처음 보는 몇 사람의 서류가 이어져 있었다.
흑백사진 속의 그들은 대부분 상당히 과거의 인물들이었다. 전 P그룹 회장 황연택, 전 장관 K, 전 검사장 L-그들의 명단 아래에는 가족관계까지 적혀져 있었다. 한데 황연택의 가족관계에서는 외동딸의 이름에만 유독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어 K장관의 며느리에도, L검사장의 질녀(姪女)에게도 똑같은 표시가 되어 있었다.
형진의 눈길이 차츰 동그레졌다. 그 밑줄 쳐진 여성들에게서 딱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낸 때문이었다.
다름 아니라 그녀들은 모두 30여 년 전 희대의 색마, 이성귀에게 희생당했던 양가집 규수들이었다. 그는 재빨리 나머지 서류들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묘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아버지, 시아버지, 숙부의 기록에서 각기 특별하게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그들의 서류에는 정확히 30년 전을 전후한 행적 부분만이 아주 소상하게 열거되어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났는지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기록들이었다.
“이, 이거 누가 가져 왔는지 얼굴을 봤어?”
형진은 서류를 전해 줬던 동료기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나 그 기자는 모르겠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75>
“여보세요?”
박미영은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접니다, 미영씨.”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당장 알아차렸다. 그였다. 여관방에서 그녀를 발가벗겼던 바로 그 이혼남이었다.
미영의 눈은 마치 못된 짓을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업이 끝난 교무실 안은 다행스럽게도 비교적 한산했다.
“통화하셔도 괜찮겠습니까?”
그런 그녀의 심정을 눈치챈 듯 이혼남이 물었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그날은 죄송했어요. 정말 죄송했습니다.”
미영은 자기가 먼저 그런 말을 내뱉었다. 남자가 점잖게 대꾸했다.
“아닙니다. 남편께서 기다리고 계셨을 텐데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
남편, 김형진. 그녀의 머릿속으로 어젯밤 잠자리가 떠올랐다.
“솔직히 많이 걱정했습니다. 혹시라도 미영씨께서…, 제가 싫으셔서 그러셨던 게 아닐까 하구요.”
이럴 때는 과연 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제대로 망설이기도 전에 혀 끝이 한 발 앞서 달싹이고 있었다.
“그,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십니까? 그럼 저와 다시 만나 주시겠습니까?
맙소사.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부탁입니다, 미영씨. 언제 뵐 수 있을까요?”
싫다고 대답해, 안된다고, 거절해야 돼-미영은 아프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본능은 이미 이성과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녀는 결국 최후의 저항을 포기해 버렸다.
“네…, 네.”
자신도 모르는 새 미영의 손바닥은 치마폭에 가려진 사타구니 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깊은 곳 근육이 팽창하고 있었다. 스타킹에 감싸인 허벅지 사이가 슬그머니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지난 밤 불만족스럽던 정사의 욕구가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부족했다. 남편은. 어쩌면 지금 전화를 걸고 있는 상대방이 그 부족함을 해소시켜 줄 남자인지도 몰랐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