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진은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거머쥔 채 이마를 찡그렸다. 책상 위에는 전날 배달되었던 서류 더미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하루가 지났다. 그는 잡지사에 출근하자마자 오전부터 종일 그 자료들을 조사하는 데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아직 뚜렷한 의문점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류들을 배달한 사람의 신원은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누군가가 형진에게 모종의 정보를 주기 위해 그것들을 보냈으리라는 추측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서류 속에 열거된 인물들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황연택 회장, K 전 장관, L 전 검사장. 그들은 모두 그가 갓 태어났을 무렵의 인물들이었다. 형진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서류철을 닫았다. 어쨌든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료 기자 하나가 사무실로 들어서는 모습을 본 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어, 김 기자. 아직 퇴근 안했어?”
상대방이 목례를 건넸다. 형진은 그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응. 아직 일이 좀 남았어.”
“작작해 둬. 마감도 끝났는데 오늘 하루 정도는 일찍 들어가야지. 그러다 와이프께서 바람이라도 피면 어쩌려고 그래?”
와이프, 박미영. 동료의 농담에 형진은 멋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설마 우리 마누라는 아니겠지.”
“너무 안심하지 말라구. 김 기자.”
“알았네.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
“나한테? 뭔데?”
“어제 N호텔에 취재 나간 게 자네 아니었나?”
“D그룹 며느리 사건 말이야? 맞아, 나였어. 그러고 보니 김 기자도 탤런트 S양 때문에 엊그제 그쪽에 갔었지?”
“나야 뭐 그 호텔 나이트클럽에 잠깐 들렀던 것뿐이야. 근데 그 D그룹 며느리 사건은 어떻게 된 거래?”
“후후, 말도 마. 알고 보니 그 여자 아주 변태더라구.”
▲ 그림 최경태 | ||
“그래. 그냥 단순한 폭행 사건이 아니었어. 그 왜, SM플레이라는 거 있지? D그룹 쪽에서는 한사코 쉬쉬 하고 있는데, 그 여자 등에 채찍질을 당한 상처까지 나 있더라는 소문이야.”
“채찍질? 그럼 남편 짓이 아니라는 건가?”
“당연하지. 그랬다면 이렇게 발칵 뒤집힐 리가 있겠어? 호텔방에서 딴 놈이랑 신나게 변태짓 해놓고, 병원에서 몰래 치료하려다가 남편한테 걸린 거지.”
글쎄다. 기이한 이야기였다. 형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남자는 누구였대?”
“그게 약간 묘해. 그 여자가 자기 이름으로 방을 예약시켜서 상대가 누구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더군. 그런 짓까지 벌일 정도면 보통 사이가 아닐 텐데…. 목격자 얘기로는 나이트클럽에서 놀다가 어떤 젊은 남자랑 단 둘이서 나갔다는 거야.”
“뭐? 나이트클럽…?”
형진의 눈동자가 동그레졌다. 나이트클럽-그렇다면 시간상으로 보아 그가 오광태와 마주친 직후에 사건이 벌어진 셈이었다.
동료 기자는 그의 놀란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계속 침을 튀기고 있었다.
“아무튼 미스코리아건 연예인이건 겉으로만 얌전한 척 굴지, 속은 다 다르다니까. 그나저나 희한한 건 그 D그룹 며느리야. 남편이 폭행죄로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치는데도 호텔방에 같이 있던 게 누구였는지 입도 뻥끗 안하고 있대. 뭐라더라…? 오히려 그 남자랑 만나겠다고 뻔뻔스럽게 이혼까지 요구중이라나? 하여간 남자 물건이 꽤나 대단했나 봐. 그렇게 실컷 매까지 맞았으면서도 유부녀가 가정까지 버리겠다고 나선 걸 보면.”
형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의혹의 그림자가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77>
박미영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며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 위로 약속장소의 간판이 휘황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시내의 어느 그럴싸한 바(bar) 앞이었다.
유리문 손잡이를 쥔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려 왔다. 그 순간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감춰진 속옷을 떠올린 미영은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레이스 팬티-그 속옷은 민망한 디자인 탓에 남편 앞에서조차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오늘 아침 남편 몰래 문을 닫아걸고 그런 야릇한 팬티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서 있었다.
아직도 기회는 남아 있었다. 그냥 그대로 돌아서서 남편 김형진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하면 그뿐이었다. 순진한 남편은 결국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문이 열렸다. 마치 그녀가 열지 않은 것처럼 열려진 그 문 안으로 미영은 한 걸음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은 그녀의 죄의식을 숨겨 주기에 충분할 만큼 어두웠다.
“여깁니다, 미영씨.”
구석 자리에서 남자가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예의 발랐다.
미영에게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는 몸뚱아리가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들 두 남녀가 어떤 사이인지 짐작도 못할 바텐더가 다가왔다. 이혼남이 술을 주문했다. 비싸 보이는 위스키 한 병이 그들 앞에 놓여졌다.
“혹시 안나오시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미영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녀는 그가 따라 주는 대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차라리 술기운으로 이성(理性)을 마비시키고 싶었다. 본능의 유일한 방해자인 이성을.
이혼남은 술을 마시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건넸다. 미영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가끔씩 조용히 웃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양주병이 절반 넘어 비워졌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자꾸만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얼마쯤 지나자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도 일찍 들어가야 하십니까, 미영씨?”
미영은 망설였다. 그 질문에는 뭔가 뜻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는 부정하려는 양 애써 그것을 무시해 버렸다.
“아니…, 아니에요.”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럼 나가시겠습니까?”
이혼남은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 미영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에 가자거나, 무엇을 하자는 따위의 말을 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도 남자도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서로 동의하고 있었다.
<#78>
“저 오늘 좀 늦을 거예요.”
김형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 너머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알았어. 나도 아직 사무실이야. 좀 더 있다가 퇴근해야 할 것 같아.”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미영이 어디에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왠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너무 늦지는 마. 늦게 되면 다시 전화해 줘.”
“네.”
언제나처럼 그들 부부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전화기를 접어 넣은 형진은 하던 일로 눈길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벨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졌다. 이번에는 휴대폰이 아니라 책상 위의 전화기였다. 그는 수화기를 어깨에 끼워넣으며 무심히 대꾸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김형진 기자님이시죠?”
“네, 전데요. 누구십니까?”
“저 닥터 최입니다. 궁도(宮島)의 닥터 최입니다.”
궁도 정신병원의 젊은 의사-형진은 그 의외의 음성에 눈을 껌뻑였다.
“아…, 네. 오래간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다행입니다. 마침 김 기자님이 계셨군요. 저 지금 서울에 올라와 있습니다.”
“서울에요? 웬일로 여기까지…?”
“김 기자님, 죄송하지만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꼭 뵙고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지금이요?”
“네. 급한 일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아니, 제가 당장 잡지사 쪽으로 가겠습니다.”
급한 일? 형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영문에서인지 닥터 최의 어투는 퍽 다급했다.
<#79>
전화를 끊은 미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어디에 들어와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미영은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야릇한 분위기로 꾸며진 방이었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었고, 그 앞에는 푹신한 원형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그랬다. 러브호텔 안이었다. 미영으로서는 두 번째 들어와 보는 장소였지만 두 번 다 상대방은 같은 남자였다.
이혼남이 다가왔다. 이미 샤워를 마친 그의 벌거벗은 몸에는 전처럼 가운데가 불룩히 솟은 삼각팬티만이 걸쳐져 있었다. 흡족하게 바라보는 사내 앞에서 미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돌아설 수도 없었다.
허리춤으로 향한 미영의 손이 스커트 지퍼 위에 얹혀졌다. 지퍼를 끌어내리는 소리가 마치 마지막 저항처럼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위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새하얀 블라우스가 방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 위로 치맛자락이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시 그 위로 스타킹이 벗겨져내렸다.
남은 것은 오직 그 사내만의 전유물이었다. 미영은 수치심을 느꼈다. 마치 그 야릇한 속옷 한 장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음탕한 여자인지 훤히 밝혀진 듯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포개졌다. 미영의 입술이 벌어졌다. 남편에게조차 제대로 응하지 않았던 그녀의 혀가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
탄성이 터져나왔다. 목줄기를 타고 내려온 이혼남의 입술이 그녀의 젖꼭지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아, 안돼요!”
그 외침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남자가 미영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두 나신이 침대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의 손길이 접근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레이스 팬티는 그렇게 쉽게 벗겨지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