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진이 잡지사 근처의 다방에 들어섰을 때, 닥터 최는 이미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복 차림의 그 의사는 형진을 보자마자 반갑게 허리를 굽혀 왔다. 하지만 왠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두 남자는 악수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한데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자기 올라오셨습니까?”
▲ 그림 최경태 | ||
“혹시 그동안 소식 못들으셨습니까, 김 기자님?”
“소식이라뇨? 어떤 소식 말씀이시죠?”
“저기, 그게 그러니까…. 경찰이나 뭐 그런 쪽에서 말입니다.”
“경찰이요?”
형진의 눈빛이 떨떠름해졌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경찰이 왜 저를 찾습니까?”
젊은 의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로군요. 다른 게 아니라 궁도(宮島)에 관한 일 때문입니다.”
궁도? 그 섬에서 또 무슨 사건이 터진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형진에게 닥터 최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 마담 사건 아직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죠. 시체까지 봤는데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일전에 자살이 아니라 타살 쪽으로 수사중이라고 하시더니, 드디어 범인이라도 잡힌 건가요?”
“죄송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실은 그 문제가 굉장히 복잡해졌습니다. 김 기자님께서도 떠나시기 전날 모발 검사를 받으셨죠?”
“모발 검사라면…. 아, 강 마담 시신에서 나온 정액 얘기로군요?”
형진이 반문했다. 제법 오래 전의 일이었다. 작부의 사체가 발견되었던 다음날, 도 경찰청에서 나온 형사들이 형식적 절차라며 그를 포함해 몇 사람의 머리카락을 채취해간 적이 있었다. 물론 유전자 분석을 위해서였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강 마담의 질 속에 남아 있던 정액으로 보아 살해당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남자와 정사를 벌였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정액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되면 그만큼 용의자의 폭이 좁아진다고 했다.
젊은 의사는 답답하다는 양 물을 들이켰다. 그의 눈썹이 어두운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차근차근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솔직히 오늘 제가 서울에 온 것은 그 사건 때문이 아닙니다. 학회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다가 그 세미나에서…. 우연히 아는 친구 하나를 만나게 됐습니다. 제가 나온 의대 동기생인데, 지금은 대학교 법의학연구소의 의사로 있는 친구입니다.”
“법의학연구소요?”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닥터 최였다. 형진은 멍하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말입니다, 그 친구가 소속된 연구소에 얼마전 경찰청에서 사건 의뢰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전자 감식 의뢰가요.”
“유전자 감식이요? 그렇다면 그 검사는…?”
“네, 맞습니다. 강 마담한테서 발견된 정액과 관련된 것이랍니다. 가끔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도 결과가 불분명할 경우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외부에 의뢰할 때가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조금….”
닥터 최는 그 대목에서 문득 말을 끊으며 형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입을 연 그는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 있었다.
“아시겠지만 이건 원래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수사기밀을 누출시키는 셈이라서…. 아무튼 김 기자님,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반드시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하여간 알겠습니다.”
형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최가 말했다.
“김 기자님, 그날 밤 강 마담과 같이 잤던 남자가 김 기자님이셨습니까?”
<#81>
‘낄낄낄, 낄낄낄낄….’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기괴한 조소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웃는 거야?”
오광태는 불 꺼진 오피스텔의 소파에 앉아 이죽거렸다. 환청, 이제 그는 더 이상 그 귀신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흐흐흐…. 타락하고 있다, 그 여자가.’
“여자? 내가 씨앗을 뿌려줘야 할 벌레가 또 있나?”
그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어둠이 말했다.
‘물론. 아주 오래 전부터 너를 기다려 온 여자다. 아주 오래 전부터.’
“어떤 여자지?”
‘너답구나, 오광태. 서두를 필요없어. 때가 되면 너도 알게 될 거다.’
오광태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그는 탁자 위의 양주병을 집어들고 마개를 땄다.
“꽤나 중요한 여자인가 보군. 당신이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면.”
킬킬킬, 목소리가 흡족하게 키들거렸다.
‘중요하지. 가장 중요해. 그 여자가 바로 네가 씨앗을 뿌려야 할 마지막 벌레니까 말이야.’
“마지막 벌레…? 하지만 그 여자를 내가 어떻게 알아본다는 거야? 여자가 한둘도 아닌데.”
‘걱정하지 마. 여자가 스스로 찾아올 테니 너는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돼.’
오광태는 독한 양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코웃음을 피식거리며 윗도리를 챙겨 들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허공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서 그 여자지?”
환청이 나지막히 대꾸했다.
‘나의 씨앗이니까.’
“당신의 씨앗?”
귀신의 대답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씨앗이라…. 오광태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렴풋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얌전해 보이는 젊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이게 그 벌레인가? 오광태는 직감했다. 어쩐지 여자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마치 멀리서 그녀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 번 더 어깨를 으쓱이며 오피스텔을 나섰다. 환청이 말한 것처럼 그 여자를 만나면 알게 될 터였다. 어쨌든 세상에는 그를 기다리는 벌레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향연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야만 했다.
<#82>
“아아…!”
가파르게 젖혀진 미영의 고개에서 가녀린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러브호텔은 심지어 천장에도 거울이 달려 있었다. 커다랗고 시커먼 그 유리 한복판에서는 기이하면서도 낯뜨거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헬스클럽 사장이라는 직업대로 이혼남의 등짝은 울퉁불퉁한 근육질이었다. 널찍한 그의 등허리를 미영의 새하얀 팔이 휘감고 있었다. 바로 위 떡 벌어진 어깨에는 그녀의 뽀얀 종아리 한 쌍이 나란히 걸쳐져 있었다.
미영은 거세게 도리질을 쳐댔다. 뭔가 이상했다. 잘못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허리를 들이밀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두 다리가 위태롭게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섹스 중인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는 것, 그것은 마치 TV나 영화 속의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철썩이며 살결 부딪치는 소음조차도 저 멀리 딴 세상에서 들려 오고 있는 듯했다.
“아…, 아니야. 안돼.”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혼남은 여자의 안된다는 표현이 오히려 된다는 뜻이라는, 그런 세간의 속설을 믿는 양 돌진만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미영의 머릿속이 점점 더 또렷해져 갔다. 그랬다. 그녀는 남자에게, 그토록 원했던 상대방에게 전혀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죄책감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거꾸로 남편에게 채워지지 못했던 그 욕구가 그녀를 날카롭게 일깨우고 있었다.
“미, 미영씨!”
사내의 하체가 부르르 경련해댔다.
“안돼! 제발, 안돼요…!”
미영은 다급하게 외쳤다. 직전과는 또 다른 의미의 외침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요구마저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자신의 허벅지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미처 그녀가 붙잡을 틈도 없이 이혼남이 허둥지둥 허리를 후퇴시켰다. 불만족의 신음소리를 막기 위해 미영은 재빨리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의 몸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하복부에 미지근한 기운이 흩뿌려졌다.
가쁜 숨을 몰아쉰 남자가 천천히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미영은 고개를 돌린 채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았다.
이건 아니야,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그녀는 속으로 되뇌였다. 분명 사내는 거칠었던 동시에 격렬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순간 미영은 한층 더 강력한 뭔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부족했다. 처음 터진 작은 봇물로 인해 엄청난 물결이 넘쳐나오기 시작한 것처럼 여전히 부족했다.
그녀는 남자가 건네는 수건을 외면하며 몸을 일으켰다. 입술 사이로 홀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돌아가야겠어요.”
정복감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혼남은 굳이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미영은 바닥에 뒹구는 옷가지들을 하나씩 주워 입기 시작했다. 허망히 벗어던졌던 레이스 팬티, 스타킹, 블라우스. 스커트의 지퍼를 끌어올릴 무렵 사내가 말했다.
“미영씨, 저는 미영씨가 마음에 듭니다. 우리는 서로 아주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표정 없는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자주 만나고 싶습니다. 언제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남자들의 섣부른 실수-한 번 안은 여자라면 언제든 자기 마음대로 타누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는 그 이혼남도 마찬가지였다. 치마폭을 쓸어내린 미영은 멍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예?”
“저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제 친구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사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왜, 왜죠? 오늘은 미영씨도 굉장히….”
“죄송합니다. 제가 바랐던 건 이게 아니었어요.”
미영은 차마 만족하지 못했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어이없어하는 남자를 남겨 두고 그녀는 홀로 러브호텔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미영의 손은 다시금 스커트 자락으로 감싸인 하복부 위에 얹혀져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지긋이 사타구니를 눌렀다. 그러자 기이한 상상이 느껴지고 있었다. 야수 같은, 아니 실제로 거친 짐승이 몸 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상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동자가 텅 빈 빛깔로 변해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차창에 반사된 눈동자들이 차츰 투명해지고 있었다. 킬킬킬, 어디선가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