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라구요?”
김형진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닥터 최가 미안하다는 양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물었다.
“부디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십시오, 김 기자님. 그날 밤 술집에 돌아가 강 마담과 함께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형진은 어이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다방 안의 손님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그들을 흘끔거렸다. 그제야 닥터 최는 슬그머니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시라면 천만다행이군요.”
“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젊은 의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만난 법의학연구소에 다니는 친구가 귀띔해 준 말입니다. 오늘 그 친구가 얼핏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비쳤습니다.”
“예에? 그건 말도 안됩니다! 그렇다면 강 마담의 질 속에 남아 있던 정액이 제 것으로 판명됐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그게 좀 묘합니다. 원래 유전자 검사라는 것도 백퍼센트 완벽한 것은 아니거든요. 한데 그 친구 이야기에 따르면…. 여러 모발 중에서도 김 기자님의 것이 가장 가깝게 판명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경찰 쪽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습니다.”
“가장 가깝다고요?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렇다는 겁니까?”
형진이 다급하게 반문했다. 닥터 최가 자신도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사람의 유전자라는 게 부모에게서 반반씩 물려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체에서 발견된 정액이 김 기자님과 부계(父系) 쪽으로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계라면 아버지 쪽 유전자가요?”
의사가 머쓱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와 살인범의 유전자가 닮았다? 형진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없었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강 마담과 섹스를 벌이고, 그녀의 음부에 정액을 남긴 남자가 살인 용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당시 작은 섬 궁도에서 형사들에게 조사를 받았던 사람은 모두 합쳐 대여섯 명도 되지 않았다. 그들 전부가 유전자 감식을 위해 모발 검사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다면 그가 가장 강력한 용의자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을 것은 뻔했다. 형진은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날 밤 저는 병원 기숙사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닥터 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모발 검사도 저만 받은 게 아닐 테구요.”
“저 역시 그 얘기를 듣고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물론 저야 김형진 기자님이 아니란 걸 믿습니다. 설사 김 기자님이 강 마담과 하룻밤을 보내셨다 해도 살인사건 따위와는 무관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미리 알려 드릴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일견 닥터 최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형진은 도저히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물론 기회가 닿았다면 그날 밤 강 마담과 살을 섞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그 노처녀 작부의 손목 한 번 잡아보지 않았었다.
▲ 그림 최경태 | ||
애써 위로하듯 닥터 최가 말했다. 형진은 심각하게 이마를 찡그렸다. 말 그대로 얼토당토 않은 누명이었다.
그때였다.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그의 등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오, 오광태!”
“예?”
“오광태, 오광태 그 사람도 모발 검사를 받았습니까?”
“어…. 아마 아닐 겁니다. 애초부터 의심한 사람이 없어서요. 그리고 그 친구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던데요?”
“하지만 그날 밤 마을에서 돌아올 때 닥터 최와 저랑 마주치지 않았었습니까? 혹시 그 사람이 우리가 떠난 후에 강 마담의 술집에 찾아갔던 건 아닐까요?”
닥터 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형진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 친구를 봤습니다. 여기, 서울에서요!”
“서울에서요? 오광태가 서울에 올라왔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틀림없습니다! 며칠 전 시내 나이트클럽에서 만났어요!”
<#84>
아내는 생각보다 일찍 들어온 모양이었다. 열쇠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던 형진은 현관에 미영의 하이힐이 벗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 안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벌써 잠들었는지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피곤한 어깨를 으쓱이며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골치 아픈 하루였다. 새벽 차를 타야 한다는 닥터 최와는 다방을 나와 곧바로 헤어졌다. 얼결에 오광태의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지만, 그들로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오광태를 찾아내야만 모든 의혹이 풀릴 성싶었다. 물론 그 젊은 친구가 살인사건의 용의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타났던 나이트클럽과 호텔에서 잇따라 발생했던 기괴한 섹스 사건들이 줄기차게 형진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신뢰하기 힘든 검사결과라 해도, 또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형진은 자신이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근래 자신의 주변에 일어난 사건들마다 오광태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더욱 더 꺼림칙하기만 했다.
설마 무슨 일은 없겠지-그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쨌든 파김치가 된 몸뚱아리부터 쉬게 만들고 싶었다. 무심코 일어서던 그가 떨떠름히 놀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안방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아내는 깨어 있었던 듯했다.
희미한 불빛을 등지고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쳐다본 형진은 이윽고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기이하게도 아내 미영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조그만 레이스 팬티 한 장만을 하반신에 걸쳤을 뿐, 상체에는 희뿌연 젖가슴마저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여, 여보…?”
형진은 그녀가 이제껏 자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잠자리에 들 때 아내는 언제나 우아하게 나이트가운을 입기 때문이었다.
의아한 노릇임에도 불구하고 형진은 미영이 왜 옷을 벗고 있는지 묻지 못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오늘따라 그녀가 그런 민망한 디자인의 속옷을 꺼내 입었는지도 결코 알지 못했다. 아내가 거실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의 코 앞에서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미영의 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투명한 천조각이 사르르 그녀의 발목 아래로 흘러내렸다.
형진이 뭐라 말릴 틈도 없이 아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 그의 바지 지퍼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마치 하루종일 남편을 벌거벗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양 서두르는 손길이었다.
어어…. 형진의 입에서 어리둥절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미영이 야릇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 느꼈던, 저 멀리 다른 곳을 갈구하는 듯한 그런 눈빛과 함께 아내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위를 서슴없이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미처 세워지지도 못한 남편의 사타구니에 다짜고짜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아찔한 자극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미영의 욕구는 거기에서 멈춰져야 했다.
“이, 이러지 마. 여보.”
형진의 손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허리띠를 끌어올린 그가 아내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미안해. 나 오늘 너무 피곤해. 좀 쉬어야겠어.”
형진은 뭐라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십여 분 뒤 형진이 욕실에서 돌아왔을 때, 미영은 등을 돌린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그날 밤 자신의 아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두 남자에게조차 욕구를 채우지 못한 미영의 손길이 벌거벗은 허벅지 사이를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85>
두 형사는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아 생소한 눈길을 두리번거렸다. 주눅이 들 만큼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사무실 안이었다. 대표이사 명패가 달린 마호가니 책상이 커다랗게 놓여 있었고, 구석에는 퍼팅(putting) 연습기와 골프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은 오전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경찰인 그들로서도 함부로 만나기 힘든 재벌그룹의 2세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잘해야 삼십대 초반인 그를 미니스커트 차림의 늘씬한 여비서가 뒤따르고 있었다. 늙은 형사와 젊은 형사가 예의상 나란히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번지르르하게 양복을 빼어 입은 사내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삐딱하게 회전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여비서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젊은 형사가 말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저희는….”
“아, 어디서 나오신 분들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시건방진 말투였지만 형사들은 어색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젊은 형사는 늙은 형사 쪽을 흘끔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간단히 질문 드리겠습니다. 혹시 오광태씨에 대해서 아십니까?”
“광태요?”
“저희가 듣기로는 아주 친하신 사이라고 하던데요. 요즘 오광태씨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그건 왜 물으시죠?”
남자의 태도는 녹록지 않았다. 거만하게 등을 기댄 그가 거꾸로 형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친구 아버님 부탁을 받고 오신 겁니까?”
형사들은 머쓱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피식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의원님 때문이군요. 설마 무슨 영장을 들고 오신 것도 아닐 테고, 알 만합니다.”
“그건 저희가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만나신 적 없으십니까?”
“네.”
젊은 사내의 대꾸는 짧았다.
“광태 그 녀석 공부하고 있을 텐데 제가 무슨 수로 만나겠습니까? 얼굴 본 지도 반 년은 넘었을 텐데.”
재벌그룹의 2세가 형사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시치미에 형사들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별로 도움이 못될 것 같군요. 더 물어 보실 게 있나요?”
형사계장이 젊은 형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아무 소득없이 몸을 일으켜야 했다. 남자가 그들의 등 뒤에서 무심코 물었다.
“그런데 광태 그 친구가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젊은 형사가 나서려 했다. 하지만 늙은 형사가 슬그머니 그의 팔을 붙들며 대신 대답했다.
“뭐 별것 아닙니다. 사소한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있어서….”
“폭행 사건이요?”
“네. 조폭 몇 놈하고 관련된 사건입니다만.”
이번에는 형사들의 말투가 짧았다. 그제야 상대방은 당황하고 있었다. 형사계장은 놓치지 않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광태씨를 만나신 적이 있죠?”
“그, 그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저희가 무슨 영장을 들고 온 것도 아니니까요.”
형사들이 도로 소파에 앉았다. 재벌그룹의 2세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얼마 전에 광태가 찾아온 적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 때문이었습니까?”
“그러니까…. 차가 필요하다고 왔었습니다. 용돈도 조금 챙겨줬구요.”
“자동차라면…?”
“네. 제가 몰고 다니던 은색 스포츠카를 빌려 줬습니다.”
“은색 스포츠카요?”
두 형사의 눈길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젊은 형사가 수첩을 꺼냈다.
“그 차 넘버 좀 알 수 있습니까?”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