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김형진은 으리으리한 철 대문 앞의 인터폰에 대고 재빨리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해져 있었다.
면전에서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철컹, 하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그제야 그는 대문 위에서 비디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널찍한 정원으로 들어서자 점잖은 양장 차림의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그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은 채 형진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회장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여자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형진은 푹신한 소파 끝에 초조하게 엉덩이를 걸쳤다. 호화롭게 꾸며진 응접실 안이었다. 그가 두 번째 들어와 보는 그곳은 다름 아닌 황연택 회장의 저택이었다.
그는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30여 년 전 죽은 이성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황연택 회장만이 유일한 인물이었다.
잠시 후 맞은편 문에서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나타났다. 언젠가처럼 한복을 두르고 장 비서라는 중년 사내와 함께였다. 형진은 벌떡 일어서며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어서 오시오, 오랜만이구려.”
밭은 기침을 내뱉은 황 회장이 형진에게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몇 달 전에 비해 한층 병색이 완연해져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니야. 죽어 가는 늙은이에게 남는 거라곤 시간뿐인 걸.”
노인의 음성은 왠지 비장하게 들리고 있었다. 실제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사람의 어투 같았다. 형진은 사뭇 긴장하며 말했다.
“실은 회장님께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김 기자가 나에게 청이라…. 말해 보시게.”
황연택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품 속을 뒤진 형진은 복사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N호텔에서 찍힌, 기이하게도 오광태가 아닌 이성귀의 얼굴이 나온 화면을 확대한 사진이었다.
“회장님, 이 사람을 알아보실 수 있겠습니까?”
장 비서가 돋보기 안경을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형진은 조용히 사진을 들여다보는 황 회장을 놓치지 않고 흘끔거렸다. 노인의 눈가가 어두운 주름을 그으며 찌푸려지고 있었다.
“이 사진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형진이 다그치듯 물었다.
“자제해 주십시오. 회장님은 지금 병세가 좋지 않으십니다.”
곁에 서 있던 장 비서가 끼어들었지만 황연택이 손을 내저었다. 그가 고통스럽게 대답했다.
“그 작자…, 이성귀 그 작자로군.”
맙소사-형진의 등에 차디찬 비수가 들이대어지는 듯했다. 설마가 현실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자, 잘 봐 주십시오. 정말 이성귀의 얼굴이 맞습니까?”
노인이 다시 한 번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어디서 가져왔소, 김 기자?”
황연택의 반문에도 형진은 멍하니 말문을 잃은 채 대꾸하지 못했다. 바로 며칠 전 촬영된 사진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뻔한 탓이었다.
대저택의 거실 안에 침묵과 공포가 동시에 감돌기 시작했다. 오래 전 기억이 상기된 듯 황연택 회장은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양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날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네.”
찰라 노인을 쳐다본 형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 회장의 핏기 없는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영문 모를 눈물이었다.
“드디어 김형진 자네에게 진실을 말해줄 날이 왔군. 허허, 허허허….”
형진으로서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을 추스를 새도 없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르게 노인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때였다.
“김 기자, 나는 살인자라오.”
<#92>
“제발 부탁이야, 오빠.”
함연주가 애걸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피스텔 안이었다. 오광태는 어둠이 깔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벌거벗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껏 함연주는 미니스커트를 벗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의 등 뒤에서 그녀가 거듭 애원해댔다.
▲ 그림 최경태 | ||
“후후후, 사랑이라도 한다는 건가?”
히죽 입꼬리를 말아올린 오광태가 대꾸했다. 함연주의 고개가 허겁지겁 끄덕였다.
“웃기는군. 벌레 주제에.”
“맞아, 오빠. 나는 벌레야. 그러니까 제발….”
경멸에 찬 비웃음도 그녀에게는 전혀 치욕이 아닌 듯했다. 귀찮은 벌레들-오광태는 몸을 돌려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침대 위에는 갓 정사를 마친 이혼녀 영화배우가 알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가려지지 않은 여자의 희뿌연 몸뚱아리가 빼꼼히 열려진 문을 통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함연주 니가 원하는 건 이걸 텐데?”
오광태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보이며 지껄였다. 그의 몸을 응시한 함연주는 무의식중에 움찔거리며 마른 침을 꼴깍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쾌락에 대한 독점욕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 알았어. 오빠. 다른 여자하고 하는 걸 원해? 그럼 경미를 부를게. 경미라면 나도 좋아. 우리 셋이서 같이 해, 응?”
스스로 망측한 제안까지 서슴지 않은 그녀가 스커트 지퍼에 손을 가져갔다. 얇은 미니스커트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유혹하는 몸짓으로 블라우스 단추마저 끌렀다.
“오빠는 나 좋아하지 않아? 내가 싫어?”
그녀의 치마 속에는 가느다란 끈팬티만이 전부였다. 함연주는 재빨리 그 조그만 천조각마저 끌어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속옷이 하이힐에 짓밟히는가 싶더니 그녀가 오광태를 와락 끌어안았다.
“원하는 게 뭐야, 오빠? 오빠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게!”
오광태의 팔을 붙든 함연주는 그의 손을 자신의 몸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화장기 진한 얼굴에 최대한 색기 있는 표정을 머금었다. 낄낄낄, 그러나 차가운 웃음소리만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저리 꺼져, 이 창녀야.”
오광태는 무릎까지 꿇으며 매달리는 함연주의 몸을 거칠게 밀쳐냈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울먹이며 외쳤다.
“창녀라도 좋아! 그럼 저 여자도, 경미도 모두 창녀란 말이야!”
오광태가 방에 들어서자 욕정에 취한 전직 여배우가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방문도 닫지 않은 채 함연주의 눈 앞에서 두 번째 일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뻔히 보고 있는 가운데 그녀의 침대 위에서 두 남녀의 몸뚱아리가 끈적하게 얽혀들고 있었다. 함연주는 새하얗게 입술을 깨물고 발악하듯 뇌까렸다.
“안돼, 오빠는 내거야. 내거라구!”
<#93>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연택 회장은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장 비서가 손수건을 들고 다가왔지만 손을 들어 제지한 그는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는 노인처럼 조용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김 기자. 자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비밀이 있다네. 나는 그 비밀을 30년 동안이나 지켜 왔어….”
두 가지 비밀-종잡을 수 없는 형진은 황망한 표정만 지었다. 노인은 마치 꿈을 꾸듯 뇌까리고 있었다.
“궁도에 갔었을 때…. 자네는 이상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가? 이성귀, 그 작자의 시신에 관해서 말일세.”
그러자 일순 뭔가를 상기해낸 형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이성귀의 시체에 관한 단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황연택이 탄식하듯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30년 전에 자신의 소중한 가족들을 농락당한 세 사람이 있었네…. 딸과, 며느리와, 조카를 희생당한 그 사람들은 복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방법이 없었어. 바로 그 소중한 가족들이 원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야. 그녀들은…. 그녀들은 오히려 그 사내를 그리워하고 원하면서 세상에서 사라져 갔어. 그 세 사람에게는 힘과 권력, 그리고 돈이 있었지만 그 모든 걸 지켜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
힘과 권력을 지니고 복수를 원했던 30년 전의 세 인물, 순간 형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랬다. 황 회장이 말하고 있는 비밀은 그 자신과 전 장관 K, 전 검사장 L을 각기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노인의 이야기가 띄엄띄엄 계속됐다.
“몇 년이 지났어도 그 세 사람은 복수심을 잊지 않았지. 가족들이 비참하게 타락하는 동안 멀쩡히 살아 있는 그 사내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게야. 그러나 아무도 나설 수가 없기에…. 대신 일을 맡을 사람들을 보냈다네. 저 먼, 저 먼 곳의 섬으로, 그 사내를 죽여 달라고.”
형진의 입이 멍하니 벌어져 갔다. 놀라움 정도가 아니라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의 충격이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 그렇다면 회장님께서 이성귀를…?”
“그래. 나는 살인자일세. 정확히 말하면 살인자들의 공범이지. 그들이 사람들을 보냈고…. 내가 그 사람들을 살 돈을 댔으니까.”
비로소 앞뒤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이성귀는 자살한 게 아니었다. 권력자들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서로에게 너무나 잘 맞는 역할 분담이었다. 황연택 회장이 돈을 댔다면 K 장관이 사람을 썼을 테고, 그 뒤처리는 L 검사장이 맡았을 터였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네. 그들은 아주 끔찍한 방법을 택했지. 바로 원흉이었던 그 사내의….”
형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인의 고관대작이 원했던 응징이란 바로 이성귀의 거세였으리라. 궁도(宮島)에서 닥터 최가 말했던 소문, 이성귀의 시체에서 괴이하게도 음부만이 사라졌더라는 그 소문은 결국 모두가 사실인 셈이었다.
쿨럭쿨럭, 자지러질 듯 기침해댄 황연택이 숨을 헐떡였다. 노인의 안색이 차츰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내가 김형진 자네에게 정말 털어놓아야 할 비밀은 두 번째라네.”
“두 번째 비밀이라뇨?”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우연의 일치지. 자네가 기자가 된 것도…. 그리고 이성귀에 관해 알게 된 것도…. 어쩌면 나는 이걸 김형진 자네에게 말해주려고 30년을 기다렸는지도 몰라.”
황 회장은 고통에 찌든 얼굴이었다. 노인은 뭔가를 꺼내려는 양 부들거리는 손으로 옷소매를 뒤적이고 있었다. 형진은 멋모르고 한 걸음 다가앉으며 말했다.
“그, 그게 뭡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건 바로 자네에 관한….”
그때였다. 곁에 서 있던 장 비서가 화들짝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회장님! 회장님!”
“커헉…! 어허헉!”
“회, 회장님!”
형진도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가슴을 움켜쥔 황연택이 휠체어 위에서 푹 꼬꾸라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와 양탄자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간호사, 간호사!”
장 비서가 버럭 고함치자 후다닥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뛰어왔다. 형진은 그 자리에 선 채 꼼짝하지 못했다. 묘하게도 어디선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