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진은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락일 만큼 작게 젖혀진 커튼 틈으로 눈을 가져갔다. 베란다 아래로 아파트 주차장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그는 십여 분마다 규칙적으로 조심스럽게 창 밖을 살폈다. 집 안은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귀가하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모든 전등을 끄고 창문마다 일일이 커튼을 치는 것이었다. 이유는 불분명했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아침에 마주쳤던 감색 점퍼의 남자들은 그 뒤로 다시 볼 수 없었다. 행여 예민해진 그가 착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꾸로 눈치채이지 않도록 사내들이 그의 시야에서 숨어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가로등 환한 길가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진은 그 사내들이 누구인지 어렴풋 직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황연택 회장 쪽에서 사람을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 회장은 감시자를 보낼 까닭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를 만나 주지도 않았을 터였고, 아예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형진이 닥터 최를 떠올리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닥터 최가 말했던, 강 마담의 시체에 남아 있던 정액과 자신의 유전자가 50퍼센트 이상 일치하더라는 해괴한 이야기를 상기해냈다.
남자들의 정체는 뻔했다. 그들은 경찰이었다. 이제 형진은 강 마담 살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형사들이 그런 그를 미행하는 것쯤은 별반 이상할 노릇도 아니었다.
그는 초조하게 거실 한가운데를 서성이며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바늘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아내는 연 이틀째 늦고 있었다.
찰칵이며 현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불을 켜지 말라고 말하려던 형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심코 스위치를 올린 미영이 그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녀는 집 안이 왜 어두운지 묻지 않았다. 그저 형진을 흘끗 쳐다볼 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또 회식이라도 있었던 거야?”
미영은 남편의 질문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구두를 벗은 그녀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안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형진은 아내를 좇았다.
“여보?”
“친구랑 만났어요. 쇼핑하고 잠깐 놀다 왔을 뿐이에요.”
쌀쌀맞은 대꾸가 돌아왔다. 미영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들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형진은 어쩐지 아내의 옷차림이 어수선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어디선가 한바탕 뒹군 듯 치마폭이 구겨져 있었다.
“우리 얘기 좀 해, 여보.”
“무슨 얘기요?”
“당신…. 요새 무슨 일 있는 거야?”
그제야 미영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즘따라 너무 늦는 것 같아. 술도 자주 마시구.”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니?”
▲ 그림 최경태 | ||
“그러는 당신은 뭔데요? 맨날 야근이고, 어쩌다 들어와도 하루종일 딴 데만 신경쓰고 있잖아요. 당신도 이상해진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나한테는 이유가 있어!”
“이유가 있다고요? 무슨 이유죠?”
“그, 그건….”
그 대목에서 형진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마터면 엉뚱한 이야기들이 튀어나올 성싶었다.
“저 피곤해요. 일찍 자고 싶어요.”
미영은 더 이상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양 욕실로 사라졌다. 부르르 어깨를 떤 형진은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복잡한 사건들-이성귀와 오광태에 관련된 엄청난 비밀은 아내라 해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살인 용의자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밝힐 수가 없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 왔다. 형진은 화를 참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수록 분노는 한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문득 방구석에 놓인 쇼핑백들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 안을 들여다보고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이가방은 기이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었다. 커피색 망사 스타킹과 화려한 디자인의 속옷들, 그리고 한 뼘 길이도 되지 않을 짧은 미니스커트 따위였다. 속옷들은 민망하게도 가느다란 끈팬티와 가터벨트였다. 게다가 뒷굽이 십여 센티는 넘을 하이힐까지 담겨 있었다.
형진의 입이 멍하니 벌어져 갔다. 포르노 배우나 입을 만한 그 야릇한 물건들은 하나같이 신품(新品)이었지만, 라벨이나 가격표는 모두 떼어져 있었다. 그는 그 옷가지들에 미약하나마 체온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아내 미영의 몸에 걸쳐져 있던 것들임이 분명했다.
<#98>
벌거벗은 여자가 샤워기 아래에 서 있었다. 여자의 희뿌연 나신을 따라 물방울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드라진 유두를 정점으로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미끈한 종아리에 이어진 우유빛 허벅지가 드러났다. 비너스의 삼각주에 돋은 까맣고 작은 수풀들이 촉촉한 물기에 젖고 있었다.
욕조 턱에 한 발을 걸친 여자가 비누거품 묻은 손으로 사타구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흔적들을 지우려는 양 정성스레 욕정의 장소를 닦아냈다.
오늘 밤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는 그녀의 남편조차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녀가 더러운 색욕에 온몸을 꿈틀거렸었다는 사실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낄낄낄…. 낄낄낄낄.”
비좁은 차내에 기괴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랬군. 그 작자의 마누라였어.”
마침내 여자의 신분을 알아낸 오광태는 고개를 젖히며 한껏 키들거렸다. 그것은 실로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번에도 환청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귀신은 그가 가장 위협을 느끼는 인물에게 보복할 실마리를 안겨 준 셈이었다.
오광태는 자신의 적이 숨어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은색 스포츠카는 주차장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다. 상대방은 그가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채 엉뚱한 짓거리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부부싸움치고는 너무 싱거웠다. 오광태의 눈 앞에는 여자의 모습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타락할수록 상대방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될 게 틀림없었다.
“걱정하지 말라구, 벌레야. 니가 원하는 그 어떤 쾌락도 실컷 맛보게 해 줄 테니까. 흐흐흐….”
그리고 모든 물건에 실망하게 됐을 때 나를 찾아오는 거야-오광태는 흡족한 혼잣말을 뇌까렸다. 최대한 잔혹하고 음탕하게 즐길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뭘 어쩔지는 순전히 그의 마음대로였다. 그는 주사위를 굴리듯 얼마든지 여자를 조종할 수 있었다. 단지 목소리가 내릴 명령만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계속해. 그럴수록 너희들은 점점 더 나의 노예가 되는 거야.”
오광태는 적과 적의 아내를 동시에 비웃으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적은 끝내 전혀 예상치 못한 시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은색 스포츠카가 천천히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99>
끈팬티, 가터벨트, 구겨진 치맛자락과 그물 스타킹. 왜 그런 옷을 입었던 것일까? 아니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속옷까지 갈아입어야 했던 것일까?
형진은 이마를 짚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내는 그 물건들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였다. 그 망측한 옷가지들은 그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위한 물건이었다.
아내가 외도를 저지르고 있다….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형진은 지난 밤에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부싸움 후에 늘 그렇듯 소파 위에서 뒤척이다가 눈을 떴을 무렵에는 이미 미영은 출근해 버린 뒤였다.
형진은 잡지사 책상에 앉아 고민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다. 감색 점퍼의 남자들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쓸 여력조차도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요란하게 벨소리를 울려댔다.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흘끔거린 옆 자리의 동료 기자가 대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주간채널> 문화부입니다. 예? 누구를 찾으신다고요?”
동료가 어깨를 흔들고 나서야 형진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전화를 건네받으며 침울한 대꾸를 중얼거렸다.
“김형진입니다. …. 여보세요?”
묘하게도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목소리가 없었다. 형진은 끊어진 게 아닐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였다. 나지막히 젊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S양 사건을 담당한 기자님이시죠?”
“탤런트 S양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만.”
“제보할 게 있어요.”
“제보요?”
“네. 그 여자…. 나이트클럽에서 그 여자와 함께 있던 남자가 누구인지 제가 알아요.”
그러자 형진의 귀가 번쩍 뜨였다. 여자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순간 그는 온몸을 소스라쳐야만 했다.
“그 사람은 오광태라는 남자예요. 오광태, 국회의원 오현성의 아들이에요.”
형진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는 화들짝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오, 오광태라고요?”
“그래요. 오광태 그 사람이 S양과 섹스를 했어요.”
맙소사! 형진은 쇠망치로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여자는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냉랭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잇달아 한층 더 기겁할 이야기가 들려 왔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신문에 난 재벌집 며느리 사건도 오광태 그 남자가 한 일이에요.”
“그, 그게 사실입니까?”
“전부 사실이에요. 원하시면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어요.”
“증거요? 아가씨는 누구시죠? 어떻게 오광태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한동안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가느다란 숨소리만 흘리고 있었다. 그는 다그쳐 상대방을 불러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어요. 아무튼 그 사람은 섬에서 나온 뒤로는 계속 서울에 있으니까 찾아 보세요. 그럼 다 아시게 될 거에요.”
뚝, 그리고 통화가 끊어졌다. 형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뭔가를 결심한 듯한 말투로 보건대 여자의 제보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여자는 궁도에서 달아난 오광태가 서울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오광태와 가까운 사이임이 틀림없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N호텔의 사진은 결국 오광태였다는 것인가-흐릿하기만 하던 형진의 의혹이 사실로 둔갑하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