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쥐었던 수화기가 천천히 미끄러져 떨어졌다. 김형진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성귀를 기억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황연택 회장마저 N호텔에서 촬영된 얼굴이 이성귀라고 했었다. 한데 이번에는 거꾸로 그 얼굴의 주인공이 오광태였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노릇이었다. 정체불명의 여자가 지껄인 이야기에 따르면 오광태가 나왔어야 할 사진에 30년 전 죽은 이성귀가 대신 찍혀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성귀가 오광태고, 오광태가 이성귀라는 말인가? 형진은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 그놈이야. 틀림없어!”
섬뜩하게 돋는 소름으로 그의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궁도에서 벌어진 강 마담 살해 사건의 진짜 범인도 오광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수많은 여자를 농락한 능력으로 보건대 가능성은 충분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전화를 건넸던 옆 자리의 동료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진의 입에서 홀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빨리…. 빨리 그놈을 찾아야 해.”
“찾아? 누구를 찾는데?”
형진은 대꾸하지 않고 넋나간 사람처럼 휘휘 손을 내저었다. 이제는 앉아서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나서야 할 문제라고 그는 직감했다. 결국 오광태로 인해 그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탓이었다.
책상 위를 뒤진 형진은 종이 한 장을 꺼내 허둥지둥 글씨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십여 분 뒤 잡지사를 뛰쳐나온 그는 다짜고짜 택시에 올라탔다.
“N호텔로 갑시다. 최대한 서둘러서요.”
그는 행선지를 묻는 기사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로서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었지만 오광태를 찾아낼 때까지 아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 그림 최경태 | ||
중년의 형사계장은 경찰서 창가에 서서 이마에 굵은 주름을 그어댔다. 그의 심정처럼 저녁 하늘이 점점 탁한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젠장,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이거 벌써 몇 주째인지 원….”
늙은 형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뇌까렸다. 형진은 알 턱이 없었으나 그도 똑같은 인물을 찾느라 답답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높으신 어른이 지시한 탐문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었다. 웬만한 범죄자들 뺨칠 만한, 실로 귀신 같은 솜씨의 은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동차 번호까지 입수하고 있었지만 어쩌다 불심검문에라도 걸리지 않는 한 차적조회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일전에 만난 국회의원 비서관이란 사내는 매일 꼬박꼬박 전화를 걸어 상황이 어찌됐는지 캐묻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튀어나오려는 욕지꺼리를 애써 억누르며 아직이라는 대답만을 반복해야 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채 피우지도 않은 긴 담뱃재가 떨어졌다. 젊은 형사가 허겁지겁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일이 터졌습니다, 계장님!”
“일?”
형사계장은 떨떠름한 눈을 껌벅였다. 엉뚱하게도 젊은 형사는 그가 아닌 책상 위 컴퓨터로 달려들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계장님, 혹시 오늘 아침에 스포츠신문 보셨습니까?”
“스포츠신문?”
“예.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컴퓨터의 전원을 켠 형사가 계장의 얼굴 앞에 뭔가를 흔들어댔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조그만 CD 한 장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컴맹인 거 몰라서 그래?”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걸 좀 보십쇼.”
형사가 컴퓨터 안에 디스크를 집어넣었다. 윙잉거리며 화면이 나타나자 늙은 형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동영상이 담긴 디스켓인 듯했다. 그런데 모니터에서는 적잖이 민망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없이 벌거벗은 여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탄탄하고 늘씬한 몸매의 여자였다.
“어…. 저 얼굴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알지. 몇 년 전 결혼했다가 이혼한 영화배우 아니야? 나도 오늘 아침 신문에서 읽었어. 아주 대서특필됐던 걸. 저 여자가 섹스하는 걸 찍은 포르노 비디오가 유출됐다며? 그럼 설마 이게…?”
이윽고 화면이 바뀌었다. 전직 영화배우라는 여자가 어느 호화롭게 꾸며진 방 안의 침대 위에서 엉덩이를 높이 쳐든 채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똑같이 나신(裸身)인 남자 하나가 나타나 그녀의 뒤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망측한 교성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예끼, 이 친구야! 큰 일이라더니 고작 이런 포르노나 보자는 거였어? 이럴 바엔 간만에 일찍 퇴근이나 해.”
짐짓 점잔을 되찾은 형사계장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젊은 형사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게 아닙니다, 계장님. 이 장면을 보세요.”
늙은 형사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돌렸다. 컴퓨터 화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의 눈길이 차츰 휘둥그레졌다.
“어럽쇼? 이, 이 친구는?”
“맞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친구, 오광태입니다…!”
두 형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지된 영상 한가운데에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오광태였다.
“오늘 오후에 사이버 수사대에서 입수했습니다. 매스컴들은 지금 난리가 아닙니다. 얼굴까지 훤히 드러낸 걸로 봐서는 누군가가 악의적인 목적으로 일부러 유통시킨 거랍니다.”
젊은 형사가 재빨리 설명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늙은 형사는 멍한 음성을 더듬었다.
“고의적으로 퍼뜨린 거라고? 이 자식…. 이 자식 뭐하는 놈이야? 안되겠어, 문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저 녀석을 얼른 찾아내야겠어!”
<#102>
“뭐야, 김형진 이 친구 어디로 사라졌어?”
잡지사 안에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부장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김 기자…. 휴가중인데요.”
누군가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대꾸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하지만 벌써 사흘째야, 사흘째! 나도 없는 새에 이렇게 종이쪽 하나만 달랑 남기고 사흘이나 안 나타나는 경우가 대체 어디 있냐구!”
부장은 형진의 휴가원을 집어들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랬다. 벌써 사흘이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 휴가원은 형진이 정체불명의 여자로부터 제보를 받자마자 작성한 것이었다. 부장의 말대로 그는 그날 이후로 3일 간이나 계속 사무실을 비우고 있었다.
한심하다는 듯 부장은 아무에게나 손가락질을 해댔다.
“김 기자 집으로는 전화해 봤어?”
“아무도 안 받습니다. 밤 11시가 넘어서 걸었는데도요.”
“미치겠군, 그 친구는 와이프가 바람이라도 났대? 휴대폰은 어떻게 돼 있어?”
“그쪽도 해 봤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으드득, 이를 간 부장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기자 한 사람이 주춤주춤 그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저, 근데요. 부장님. 요즘따라 이상하게도 김형진 기자를 찾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 친구를 찾는 사람들?”
“예. 어제 오후부터 몇 시간마다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 오고 왔습니다.”
“그래? 누구라는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로 남자들이었습니다. 참…. 그중에서 한 번은 장 비서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할 말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장 비서라고 얘기하면 김 기자가 알 거라던데요.”
“장 비서…?”
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야기를 꺼낸 기자도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잔뜩 찌푸린 날씨의 오후였다. 잡지사 창문에 빗방울이 후두둑 들이치기 시작했다. 먹구름들이 잔뜩 몰려들더니 하늘가가 우르릉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 시각 김형진이 전혀 다른 곳에서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