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옥집들이 즐비한 강남의 어느 주택가.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빗방울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폭우에 가려 가로등마저 희미한 길가를 강아지 한 마리가 배회하고 있었다. 모퉁이 집 대문에서 뛰어나온 그 새하얀 마르티즈는 거센 빗줄기도 아랑곳없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코를 킁킁거렸다.
자동차 한 대가 골목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강아지는 환하게 헤드라이트를 밝힌 그 자동차를 보자마자 꼬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해피야, 어디 있니, 해피야?”
빗소리 너머로 강아지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자동차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멋모르고 다가간 강아지가 차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사납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시커먼 팔뚝 하나가 쑥 튀어나와 마르티즈의 목을 움켜쥐었다. 버둥거리며 허공에 들어올려진 강아지의 주둥이에서 혀가 튀어나왔다.
“해피야?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얘가 어디 간 거야?”
골목 어귀에 사람이 나타났다. 강아지를 붙잡은 손이 차창 속으로 사라졌다. 끼이이익, 날카로운 바퀴 소리를 내며 은색 스포츠카가 주택가를 빠져나갔다.
<#107>
김형진의 몸뚱아리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황연택 회장이 다시 한 번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 딸은 그자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던 게야….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그 아이에게는 친구보다도 자신의 쾌락이 더 중요했어. 내가 그걸 알아냈을 때에는 이미 이성귀가 자네 어머니를….”
“마, 말도 안돼. 어떻게 그런….”
형진은 도리질을 쳤다. 두 번째 비밀이란 결국 이것이었단 말인가-그는 밤마다 색욕에 꿈틀거리던 어머니의 육체와, 그런 어머니를 탐닉하던 수많은 사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린 시절 측은함을 머금고 애써 외면하던 삼촌들의 시선을 기억해냈다. 궁도에서 돌아온 이후 자신이 왜 그렇게 끊임없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는지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설마 제가 이성귀의…?”
그는 부들부들 떨며 황연택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참회의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부디…, 부디 내 딸년과 나를 용서해주게. 자네에게는…. 자네에게는 차마 그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어.”
으아아아, 머리카락을 감싸쥔 형진은 비명을 질렀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주시는 겁니까? 왜요?”
“회장님, 고정하십시오! 더 이상 계속하시면 위험합니다!”
곁에 서 있던 장 비서가 애원해댔다. 그러나 황 회장은 차츰 숨결이 가늘어지면서도 굳게 고개를 저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노인의 탁한 시선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다.
“아니야. 이제는 때가 됐어. 김형진…, 김형진군.”
최후의 기운을 모은 듯 헐떡이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꿈을 꾸었네. 꿈속에서 이성귀…. 그를 봤어. 그는 아직도 살아 있다네. 귀신이 되어서…. 수많은 여자들을 농락하면서….”
황연택이 앙상한 손을 내밀었다. 형진은 차마 그 손을 붙잡지 못했다.
“그는 원귀(寃鬼)가 되어서 누군가의 몸 속에 버젓이 살아 있어…. 그 원귀를 달래 줘야 해.”
노인은 실성한 사람처럼 뇌까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침대 주변의 기계들이 요란하게 삑삑거렸다.
“제발 그만 하십시오, 회장님! 이봐! 거기 누구 없어?”
장 비서가 허둥지둥 병실 밖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형진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뭔가를 해야 했으나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벌컥 열려진 문으로 의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이 바쁘게 기계를 만지기 시작하자 노인이 마지막으로 고통스럽게 입가를 씰룩였다.
“부탁이야. 죽어서라도 속죄할 테니 부디 김형진 자네가…, 자네가 아버지의 원귀를 달래 주게. 이게 내 마지막 유언일세….”
순간 시퍼런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콰르르릉, 귓가를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유리창을 흔들었다.
“어억…!”
황 회장이 검붉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를 향해 파르르 경련하던 노인의 손가락이 천천히 침대보 위에 떨어졌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달려왔다. 복도에서 나지막한 울음소리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황연택이 죽은 것이었다.
▲ 그림 최경태 | ||
‘낄낄낄, 우히히히…. 낄낄낄낄.’
기괴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번쩍-서늘한 광채가 어두침침한 오피스텔 안을 가로지르며 섬뜩한 모습을 드러냈다.
방 한가운데에 벌거벗고 선 오광태의 손 끝에는 시퍼런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갓 숨이 끊어진 마르티즈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하얗던 강아지의 털은 시뻘건 피로 범벅이 되어 마치 너덜너덜한 걸레쪽처럼 변해 있었다. 오광태는 잔혹함이 던져 주는 쾌감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그만, 드디어 늙은이가 죽었다.’
“늙은이? 고작 늙은이 하나 때문이었나?”
‘그놈의 명을 재촉하기 위해서였다. 그놈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 최대한 고통을 주었는데도 너무 많은 것을 말해 버렸다.’
어깨를 으쓱거린 오광태는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손으로 술병을 집어들었다.
“그럼 차라리 나더러 직접 죽이라고 하지 그랬어? 이 따위 개새끼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아니. 그건 안돼.’
“왜지?”
‘나를 죽인 게 그놈들이었으니까.’
“당신을 죽였다고? 당신을 헤칠 수 있는 인간들도 있었나?”
‘오래 전 일이지. 아주 오래 전, 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지만 오늘로 그 마지막 늙은이가 사라졌다.’
오광태는 소파에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흐흐흐, 환청이 키들거렸다.
‘이제 모든 방해물이 없어졌다, 오광태. 아무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 너는 최후의 목적을 달성해야 해.’
“최후의 목적이라….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그래. 나는 오직 이 날만을 기다려 왔다. 어떠냐? 여자가 보이나?’
“모르겠군. 어째서 그 벌레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오광태가 반문했다. 술을 꿀꺽이던 그의 발 끝에 신문지 한 장이 차였다. 그는 눈썹을 찡그린 채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여배우 A양 섹스비디오 유출, 이라는 활자가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그 비디오 속의 주인공은 오광태 자신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건을 일으킨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다. 영원히! 자, 그 여자에게 가거라. 그리고 나의 씨앗을 잉태시켜라. 오광태!’
귀신이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108>
김형진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시커먼 거리를 멍하니 걷는 중이었다. 거센 빗줄기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지나치는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흙탕물을 잔뜩 튀겨댔지만 그는 한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흐흐, 흐흐흐….”
그의 입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우우욱, 형진은 어느 건물 모퉁이를 짚고 선 채 거세게 구토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찰라 숨을 헐떡이던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며 화들짝 사방을 둘러보았다.
“제기랄, 안돼!”
그는 소스라치며 텅 빈 길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황연택의 마지막 말이 뇌리를 스친 때문이었다.
<#109>
“어…. 기, 김 기자?”
우당탕탕, 부서질 듯 문이 열렸을 때 잡지사 사무실에는 당직 기자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 동료 기자는 형진을 보자마자 기겁을 해댔다. 폭우 속을 그대로 뚫고 온 그의 옷자락 전체에서 빗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형진은 동료의 놀란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그는 책상 위의 물건들을 두 손으로 거칠게 무너뜨렸다. 산더미 같은 종이쪽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새하얗게 희번덕이는 그의 얼굴 앞에서 동료 기자는 얼떨떨하게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형진은 정신없이 서류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는 황연택 회장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출생에 관한 비밀뿐만 아니라, 이성귀가 살아 있다는 것까지도 전부 사실이었다. 형진은 궁도(宮島)의 의사 닥터 최가 귀띔했던-강 마담 살해범과 자신의 유전자가 정확하게 50퍼센트 일치하더라는 이야기를 상기해냈다. 닥터 최는 노처녀 작부의 시체에 남아 있던 정액이 그와 부계(父系) 쪽으로 흡사하다고 했었다.
한데 다름 아닌 이성귀가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결코 강 마담과 정사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성귀가 현재에 저지른 일이라는 의미였다.
내가 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형진은 사진과 자료들을 내팽개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야 했다. 모든 것이 똑같았다. 과거의 이성귀와 현재의 오광태가 벌인 행각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수법도 물론이거니와 희생양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에게 농락당한 여자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모습으로 타락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안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정말 귀신이라는 건가? 형진은 경악했다. 황연택의 말처럼 이성귀는 살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너무나 선명한 증거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성귀가 오광태였고, 오광태가 이성귀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