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안녕하세요.
그녀> 어서 오세요.
나> 누구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그녀> 아니에요. 그냥 이야기할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나> 잘됐군요. 저도 그런데.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인터넷의 어느 대화방 안에서였다. 채팅(chatting), 그날 밤은 지독히도 머리가 돌지 않았다.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던 나는 아무 생각없이 웹 브라우저를 띄웠고 결국은 그곳까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일보다는 누군가와 무작정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자정이 넘었는데 안 주무시나요?
언제나 그렇듯 채팅은 나의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다. 반대로 나 역시 상대방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 어떤 공통 관심사도 없이 대화를 시작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뭐든지 묻거나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녀는 대답 대신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emoticon)을 그렸다. 나는 두 번째 질문거리를 찾았다. 채팅창 위에는 방제가 적혀 있다. 그런 대화방에는 수백, 수천 개의 방제가 동시에 난무한다. 그중에서 내가 그녀의 대화방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이었다. 그녀가 붙인 제목은 단순히 ‘서른셋’이었다.
나> 방제가 무슨 뜻이지요?
그녀> 아, 제 나이에요.
나> 그렇다면 저와 동갑이로군요.
나는 채팅을 할 때면 되도록 점잖은 말씨를 썼다. 거창하게 국어 순화 운동에 동참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행에 민감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 번 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녀> ‘나’님은 왜 안 주무시고 계세요?
나> 저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녀> 이 시간에요?
나> 네.
그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왠지 내 직업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 그냥 잠을 안 자면 돈을 버는 직업입니다.
그녀> 좋은 직업이네요.
나> ‘그녀’님은 직업이 있으신가요?
그녀> 회사원이에요. 얼마 전부터 다시.
나> 다시?
그녀> 네. 몇 년 일을 쉬었어요. 아이 때문에.
그녀는 결혼한 여자였다. 나는 유부녀가 새벽 시간에 채팅을 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경험상 그리 좋은 느낌일 리는 없었다. 내 생각을 눈치챈 듯 그녀가 먼저 말했다.
그녀> 실은 저는 채팅을 배운 지 얼마 안됐어요.
나> 재미있으세요?
그녀> 그렇기도 하지만…. 가끔 귀찮게 구는 남자들은 싫어요.
나> 어떤 남자들이요?
그녀> ‘나’님이 들어오기 전에도 몇 사람이 왔었어요. 번개를 하자거나,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하겠느냐고 묻는 사람들이었죠. 그리고 또, 컴….
나> 컴?
그녀는 잠시 동안 대답을 멈췄다.
그녀> 그러니까…. 컴섹을 하자고요.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녀> ‘나’님도 그런 걸 좋아하세요?
나> 아니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 다행이네요.
내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내가 그런 남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들어했고, 나는 그녀가 무슨 목적-아르바이트나 번개를 원한다는-을 지니고 있지 않은 데에 만족했다.
그녀> 이런 곳의 남자들은 다 그런가요?
나> 꼭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익명성이란 때때로 사람들에게 만용을 부추기죠.
그녀> 어쨌든 그런 남자들이 있다는 건…. 그런 여자들도 많다는 뜻이겠죠?
나> 그렇겠죠. 아마도.
그녀> ‘나’님은 그런 여자분을 만난 적이 있으세요?
나> 네. 일부러는 아니고, 어쩌다가 마주치는 정도죠.
그녀> 그럴 때엔 어떻게 하시나요?
나> 대부분 제가 먼저 쫓겨나더군요. 강퇴로.
그 첫날, 그녀의 호기심은 대체로 그런 쪽이었다. 우리는 한 시간쯤 더 대화를 나눴다. 나는 내가 아는 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그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 제법 규모가 큰 회사에서 일을 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만두었다가 최근에 좀 더 작은 회사로 일자리를 옮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왜 결혼까지 했으면서 그녀가 다시 직장을 갖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녀> 이제 자야겠어요. 내일 출근해야 되거든요.
나> 그러세요. 너무 늦었군요.
그녀>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나> 그럼 친구로 등록시켜 놓으면 돼요.
그녀> 친구…. 어떻게 하는 거죠?
나> 제가 할게요.
그녀> 고마워요.
나는 대화상자의 친구등록 칸을 클릭했다. ‘그녀’의 아이디가 깜빡였다. 우리의 만남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 그림 최경태 | ||
J가 말했다. 누군가가 대꾸했다.
“글쎄…. 룸살롱이나 단란주점?”
“아냐. 그런 데는 한물 갔다구. 게다가 푹푹 찌든 계집애들이잖아. 요즘에는 제대로 된 애들을 만나려면 인터넷을 해야 돼.”
“인터넷?”
“그래. 채팅(chatting) 말이야. 비교적 쌩쌩한 여자애들이 많거든.”
J와 나, 대학 동기들인 우리는 상가집 구석에 모여 앉아 있었다. 친구들 중 하나가 부친상을 당했던 날이었다. 30대가 넘으면 어지간한 사건이 없는 한은 동창들을 만날 기회조차 드물어지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각자 무거운 색의 양복에 점잖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이야기는 금세 가볍고, 저속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예 노골적으로 먼저 접근하는 애들도 많아. 20만원이니 15만원이니 대뜸 가격부터 부르는 계집애들도 있구.”
“그러다 걸리지 않나?”
“다 수가 있지. 며칠 전에는 회사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우연히 ‘20대 환영’이라는 방에 들어간 적이 있었어. 나는 처음에 그게 나이를 얘기하는 걸로 착각했었어.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방 주인인 여자애의 가격이더라구. 일종의 암호였던 거야. 20만원이면 같이 자 주겠다는.”
J는 숟가락을 이용해 맥주병을 땄다. 그는 내가 내민 잔에 술을 채워 돌려 주었다. 다른 친구가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나는 채팅 같은 건 귀찮아서 못하겠더라.”
“그래도 도전하는 재미가 있잖아. 돈 받는 선수들만 아니라면.”
“도전? 웬 도전?”
“생각해 봐, 우리 어린 시절에 여자 꼬시는 목표가 뭐였냐? 한 번 자빠뜨리겠다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건 도전이라구.”
J의 진지한 말투에 친구들이 덩달아 키들거렸다.
“지금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미팅을 하겠어, 헌팅을 하겠어? 하지만 채팅할 때는 그런 재미가 있단 말이야. 꼬시고, 작업하고, 그러다 여관까지 들어가는 건 연애 시절하고 마찬가지니까. 니 생각은 어때, 김태영?”
J는 나를 향해 물었다. 어색하게 웃어넘겼지만 나는 그 말에 얼마간 동감하고 있었다. 가끔은 나도 그런 시절의 감정이 그리운 탓이었다. 불쑥 손목시계를 쳐다본 J가 시큰둥히 뇌까렸다.
“그나저나 여자애들은 한 명도 안 나타나는군. 은정이 정도는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정이-그 이름에 나는 슬그머니 이마를 찡그렸다.
“누구 은정이한테 연락한 사람 없어?”
“관 둬. 시집간 애가 이런 데에 올 수 있겠냐?”
누군가가 말했다. J의 시선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른셋이란 나이는 뭔가 붕 뜬 나이로 느껴진다. 현재가 그렇다기보다는 과거의 의미에서 훨씬 더 그렇게 느껴진다.
세대(世代)라는 말은 아마 우리 또래에 제일 먼저 쓰였을 것이다. 요즘은 흔히들 ‘386세대’를 입에 올리지만, 그것은 어떤 특정 계층을 가리킬 목적으로 훗날에 생겨났을 뿐 실제 그들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부터 쓰인 단어는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나나 내 친구들은 그 세대에도 속하지 못한다. 엄밀히 따진다면 시간적으로는 그들의 바로 뒤였다.
우리를 지칭하는 표현은 소위 ‘엑스(X)세대’였다. 그랬다. 그들보다 어리고 또 금세 사라졌어도 우리는 그런 세대로 불렸다. 70년대 초에 태어나고, 80년대의 마지막과 90년대 초에 걸쳐 대학을 다녔으며, 사회에 뛰어들자마자 IMF를 맞은, 갓 서른을 넘긴 나이들.
우리는 참으로 어중간했다. 그만큼 변화도 많이 겪었다. 우리가 10대일 때에 전교조(全敎組)가 일어났다. 군사정권의 끝자락에 신입생이 되었던 우리는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시위 현장에도 서 있었다. 그러다 군대를 제대해서는 아무런 이슈(issue)도 없는 민주화 시대에 살아야 했다.
학교 리포트를 손으로 쓰는 글씨가 아닌 컴퓨터 워드로 작성하기 시작한 것도 우리였다. 하지만 우리가 졸업할 무렵엔 이미 인터넷이란 현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대중적으로 본다면 팝송 대신 가요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를 방화(邦畵)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힙합(Hip-hop)과 레게(reggae)가 나왔다. 심지어 군대에서 지급되는 담배조차도 바뀌었다.
은정이, 차은정. 그녀와 나는 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하고 계셨어요?”
그렇게 막 컴퓨터를 껐을 무렵 효미가 집에 돌아왔다. 새벽 두 시였다.
“채팅하고 있었어.”
“일은 안하시고요?”
응, 나는 대답했다. 차라리 일을 하고 있었다고 둘러대는 게 나았을 성싶었다. 효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방문에 기대어 선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원고가 안되면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세요.”
“미안해. 그냥 머리가 안 돌아서 그랬어.”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시간까지 효미가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효미는 문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파란 청치마를 끌어내린 그녀가 착 달라붙는 민소매 티셔츠를 어깨 위로 빼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