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목록을 살피기도 전에, 로그인(log-in)을 한 모니터 귀퉁이에 그런 글씨가 떠올랐다. 발신인은 ‘그녀’였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아이콘을 클릭했다.
-‘나’님, 접속하시거든 알려 주시겠어요?
그녀의 아이디를 조회했다. 그녀는 아무 대화방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 대기자 상태였다. 회신을 보내자 이윽고 지난번처럼 채팅 초대 메시지가 이어졌다. 방제는 ‘서른셋’이 아니라 ‘그녀’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 어서 오세요.
나> 안녕하세요.
그녀> 오늘은 늦게 오셨네요.
나> 방금 집에 돌아왔거든요.
그녀> 퇴근? 아니면 외출?
나> 퇴근은 아니고, 그냥 술을 좀 마셨어요.
그녀> 약속이 있었나 보군요.
나> 아니요. 혼자 마셨어요.
그녀> 혼자 술을 드셨다고요?
나> 네.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직업상.
직업상이라는 말에 그녀는 알쏭달쏭해하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그려 보였다.
그녀> 혼자라면…. 어디에서 드셨어요? 포장마차?
나> 동네에 있는 바에서요.
밤 늦게 홀로 바(bar)에서 술을 마시는 남자. 그녀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내 손가락이 설명을 시작했다.
나> 조용히 머리를 식히려면 그런 데가 편하죠. 포장마차라면 왠지 처량해 보일 테니까요.
그녀> 하긴 그렇겠네요. 많이 드셨나요?
나> 맥주 두어 병 정도요. 많이는 안 마셨어요.
대충 둘러댔지만 실제로 내가 마신 것은 그보다는 좀 더 많았다. 더블로 가득 채운 위스키 네 잔을 비우고도 작은 크기의 맥주가 세 병이었다. 자판을 두드리며 간간이 오타(誤打)가 생길 지경이었다. 나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나> 언제 들어오셨어요?
그녀> 한두 시간쯤 됐어요.
나> 오래 됐군요. 뭘 하고 계셨는데요?
그녀> 아무것도 안했어요. ‘나’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 저를 기다리셨다고요?
그녀> 네.
내 눈이 슬그머니 껌뻑였다. 정말일까.
그녀> 다른 사람들하고는 대화해 봤자 별로 재미가 없어서요. 자꾸 이상한 이야기만 하구.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비록 가상공간이라고는 해도 몇 시간씩이나 나를 기다려 주는 여자라….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묘한 기분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덕분에 술기운이 잠시 달아났다.
나> 그렇다면 제가 미안하네요.
그녀> 아니에요. 미리 약속했던 것도 아닌데요 뭐.
나> 하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있어도 괜찮으세요? 다른 분들도 계실 텐데….
그녀> 다른 분이요?
나> 어…. 아기요. 아기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남편 분도 계시고요.
어쨌든 그녀는 유부녀였다. 솔직히 아기보다는 그녀의 남편 쪽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아이는 자고 있어요. 그리고 남편은….
뭔가를 망설이는 양 잠시 후에 대꾸가 돌아왔다.
그녀> 남편은 지금 없어요.
나는 머쓱하게 이마를 찡그렸다. 남편이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 남편께서 오늘 야근을 하시나요?
그녀> 아뇨.
나> 그럼 출장중?
그녀> 아뇨. 저는 아이랑 둘이 살아요. 실은 아이도 평소에는 친정에 맡겨요.
남편도 없고, 아이도 친정에 보내고, 그렇다면 설마,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어야만 했다.
나> 혹시…. 이혼이나 별거를 하고 계신가요?
만약 아니라면 그녀가 당장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녀> 후후, 이혼은 안했어요. 별거는 맞겠지만.
모호한 대답이었다. 아이까지 재우고 나서 밤새 채팅에 매달리는 유부녀는 대체 어떤 종류의 여자라는 말인가.
하기야 남편이 곁에 있다면 아예 그럴 수도 없을 터였다. 세상은 비교적 채팅이란 문화현상에 대해 관대하다. 설사 이성(異性)과 단 둘이 몇 시간씩 대화방에 머물러 있어도 단순히 ‘채팅을 했어’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음성을 글자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만약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자(여자라면), 혹은 다른 여자(남자라면)와 하루종일 전화를 해댔다면,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나> 실례지만 무슨 뜻인지….
그녀>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그이하고 떨어져 있는 거예요.
말투로 보아 그녀는 꽤 오래 남편과 따로 지낸 게 분명했다.
▲ 그림 최경태 | ||
은정이가 말했다.
“작가?”
“응. 소설 아니면 영화 시나리오를 쓸 거야.”
그것은 내가 은정이의 꿈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집에서 멀지 않은, 어느 공원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언제나 그 공원이 마지막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우리는 주로 그녀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그리고 시내에서 영화를 보거나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도 항상 그곳에 들렀다. 나로서는 어차피 그녀를 바래다 줘야 했으니 편했고, 물론 조금이나마 더 함께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나와 은정이 사이를 아는 것은 가장 친한 J만이 유일했다.
“왜?”
당시는 내가 소위 글쟁이가 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날 밤 생맥주집에서 각자 몇 잔씩을 주고받았던 우리는 둘 다 조용히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오래 전부터 꿈이었어. 그래서 창작 동아리에도 들어간 거야. 미리 공부하기 위해서.”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은정이 역시 소설과 영화와 음악을 좋아했다. 그녀의 취향은 나만큼이나 독특했지만, 최소한 그녀는 목표가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아무 생각도 꿈도 없었다. 어떤 것에도 흥미를 갖지 못했기에 그것들을 택했을 뿐이었다.
나무 잎새들 틈으로 가로등 불빛이 무늬처럼 드리워진 공원 안에는 그 시각이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은정이의 긴 머리채는 내 가슴팍에 비스듬히 얹혀져 있었다. 그 즈음 나와 그녀는 연인 사이에 거쳐야 할 행동들을 조금씩 배워 가는 중이었다. 고개를 숙인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입술을 떼자 은정이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바라보였다. 벤치 아래에는 감색 치맛자락 밑으로 한 쌍의 둥근 허벅지가 가지런히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무릎 길이에서 찰랑이는 스커트를 즐겨 입었다. 그런 옷차림은 그녀의 날씬하고 뽀얗게 뻗은 다리에 가장 잘 어울렸다.
내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살며시 스치며 그 풍만한 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우리의 입술이 다시 한 번 겹쳐졌다. 이번에는 미끌거리는 서로의 혀를 교환했다.
용기를 낸 나는, 아니 용기를 낼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은정이의 몸을 따라 손길을 더듬어 내렸다. 윤기를 머금은 스타킹 결이 느껴졌다. 그 안에 담긴 살결은 따뜻하면서도 땀에 젖은 듯 촉촉했다.
은정이는 거부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허벅지 사이로 들이밀자 그녀는 작게 눈썹을 찡그리며 바짝 닿은 나의 귓가에 희미한 탄성을 들려 주었다.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은정이와 나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뀐 셈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평범한 길을 걸었고 반대로 나는 그녀가 잃어 버린 꿈을 좇고 있었다.
그 일은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다음에 벌어졌다. 심지어 그녀와도 헤어진 뒤의 일이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도 거의 학교를 다닌 기간만큼이나 휴학을 일삼던 나는 졸업 직전의 겨울에 심심풀이로 써 뒀던 습작을 몇 군데의 잡지사에 보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신인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돌아왔다. 형편없는 군소 문예지였지만, 나란 놈은 그런 식으로 어줍잖은 등단을 하게 되었다.
그날 나는 효미가 일하는 바(bar)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내 자신의 직업을 털어놓았다는 것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얼마 후 다시 그곳에서 술을 마셨고 종내 단골집처럼 삼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효미 때문이었다. 외모만 아니라 꿈까지 은정이와 닮은 그녀에게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효미는 내가 스스로 포르노 작가라고 말했는 데도 마치 그런 류의 소설을 어엿한 한 장르쯤으로 이해하는 듯했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바에 갔을 때 그녀는 나에게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소설, 재미있어요?”
나는 씁쓸히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한가요?”
“네. 그런 쪽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거든요.”
“돈 벌려고 하는 일일 뿐이에요. 먹고 살기 위해서.”
내 말은 사실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글을 쓰게 된 것도 컴퓨터와 인터넷이 계기였다. 대화방에서 ‘그녀’를 만났듯이, 우연히.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