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같이 일하는 언니들이 볼까봐….”
재잘거린 그녀가 마치 친숙한 애인 사이처럼 선뜻 내 팔짱을 끼어 왔다. 나는 떨떠름히 눈을 껌뻑였다. 그녀의 서슴없는 살붙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명이 없는 곳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한 때문일까. 아니면 늘상 유니폼 차림만 보아 왔던 때문일까. 효미는 술집 안에서보다 훨씬 더 앳되어 보였다. 어깨에 찰랑이는 가지런한 머리채가 사춘기를 갓 넘긴 풋풋한 여고생의 모습 같았다. 무릎 길이의 면 치마 아래로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 종아리와 뒷무릎이 통통한 곡선을 그리며 보기 좋게 뻗어 있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포장마차가 있어요. 우리 그쪽으로 가요.”
효미가 팔짱을 낀 채 나를 이끌었다. 자그마한 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젖가슴이 푹신하게 닿아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 계란찜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술을 시킨 그녀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제가 살게요. 아까 재미있는 얘기 해 주신 보답이에요.”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연애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20대와 30대, 그녀와 나는 정확히 열 살 차이였다. 그렇게 마주앉아 있자니 어쩐지 내 자신이 꽤 늙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의 일이나 글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실제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듯 그저 각자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효미와 나는 한 시간쯤 지나 포장마차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뺨은 다시금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쉬워요. 아직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귀엽게 푸념해대는 효미의 발걸음이 슬그머니 비틀거렸다. 나는 택시를 잡는 동안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껴안다시피 부축해야만 했다. 그리 먼 길은 아니었어도 효미는 차에 타자마자 내 가슴팍에 고개를 기댄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술 취한 젊은 아가씨와 포르노 작가-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 다른 사건이 벌어질 만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효미가 자신의 집 앞에 이르러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너랑 단 둘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
나와 은정이 사이에서 그 말은 일종의 암호였다.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이 그렇듯 금기(禁忌)란 처음의 처음 한 번이 어려울 뿐, 일단 넘어서면 봇물이 터지듯 거침없어지기 마련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집에서 첫경험을 치른 후 우리의 섹스는 금세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 되어 갔다.
나는 약국에서 태연한 얼굴로 콘돔을 달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은정이 역시 직접적인 표현은 않더라도 자신의 욕구를 밝히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데이트가 끝나면 이따금씩 그녀는 유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늦추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우리…, 단 둘이 있는 곳에 갈까?”
은정이는 대답 대신 수줍게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승낙하면 우리는 학교도 그녀의 집도 아닌, 아예 동떨어진 동네로 향했다. 그리고 여관을 찾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차츰 그녀의 성감대를 알게 되었고, 그녀도 내가 좋아하는 체위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입으로 애무해 주는 방법도 배웠고, 배란일을 따져 피임을 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학년이 바뀌었다. 동아리 장(長)을 맡고 있던 K선배가 단기사병 복무를 위해 학교를 떠나자 J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사소한 위기도 있었으나 은정이와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연인 관계를 지속했다. 몇 달이 꿈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그 행복은 짧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이 다가왔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당시는 왜 그렇게 두렵고 힘들었는지 모를 사건들이 가끔씩 존재한다. 갓 스물이 넘은 사내녀석에게는 가령 군대 따위가 그랬다. K선배도 제일 친한 J도 모두 소위 방위병이었지만, 나는 신체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았다. 내가 입대를 결심한 것은 2학년을 마치고 나서였다. 휴학을 하고 채 두어 달도 지나지 않아 영장이 나왔던 것이다.
그녀> 어제는 미안했어요.
나> 뭐가요?
그녀> 아무래도 제가 많이 취했었나 봐요. 이상한 질문만 하고…. 저 때문에 곤란하셨죠?
나> 아니에요. 별로 그렇지는 않았어요.
내 말은 사실이었다. 당황하기는 했어도 실제로 왠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나’님이랑은 동갑이라 편한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해도 받아 주실 수 있으니까.
나>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녀> 그럼 앞으로도 제가 계속 편하게 얘기해도 되는 거죠?
나> 그러세요. 뭐든지.
그녀> 고마워요. 저도 ‘나’님한테 그럴게요.
우리는 서로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을 주고받았다. 나는 마치 그녀가 아양을 부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나> 술을 많이 드셨다는데 몸은 괜찮으세요?
그녀> 네. 안 그래도 열이 조금 나서 지금은 옷을 벗고 있어요.
옷을 벗고 있다-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문득 손가락을 멈췄다. 내 호기심을 눈치챈 듯 그녀가 물었다.
그녀> ‘나’님은 옷을 입으세요?
나> 어떤 옷이요?
그녀> 잠잘 때 말이에요. 무슨 옷을 입고 주무세요?
그녀> 후후, 저는 아예 안 입을 때도 있어요.
나> 잠옷을 안 입는다는 건가요?
그녀> 아뇨. 저는 파자마나 레이스 달린 드레스 따위는 질색이에요.
그렇다면 아예 아무것도 안 입는다는 뜻일까. 야릇한 상상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 아, 물론 속옷은 입어요. 브래지어는 빼고요.
팬티 차림, 그녀가 내 상상을 막으려고 꺼낸 말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그편이 더 자극적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 집 안에서는 보통 그렇게 벗고 있게 돼요. 혼자 지내는 게 버릇이 돼서 그런가 봐요. 남편이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뭔가를 억누를 수 없었다.
나> ‘그녀’님.
그녀> 네?
나> 정말 뭐든지 얘기하실 수 있다면….
그녀> 네.
나> ‘그녀’님은 혹시…, 자위행위를 한 적이 있나요?
순간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든 얼버무려야 할 성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아주 쉽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녀> 있어요.
나> 어…, 그러니까 제 말 뜻은….
그녀> 아니, 괜찮아요. 우리는 알 것 다 아는 어른이잖아요. 솔직히 저도 자위행위를 할 때가 있어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해요. 어차피 집안에 아무도 없으니까.
벌거벗은 채 자위행위를 하는 여자, 우리의 대화는 조금씩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잘 다녀와, 임마.”
J가 맥주컵에 소주를 가득 채워 건네 주었다. 나는 애써 어깨를 으쓱인 채 그 잔을 꿀꺽였다.
나와 은정이, 그리고 J는 시내의 선술집에 앉아 있었다. 입대 날짜의 고작 사흘 전이었고 우리들만의 마지막 송별연이 벌어지던 날이었다. 그때는 ‘입영열차 안에서’라는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누가 신청했는지 몰라도 술집 안에는 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걱정 마라. 은정이는 내가 잘 지켜 줄 테니까.”
J는 농담을 지껄이며 내 등을 두들겼다. 나는 은정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은정이는 아주 어색한, 억지로 짓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얼레…. 은정이 너 태영이 앞에서 우는 건 아니겠지? 그거 알아? 절대 안 도망갈 것처럼 엉엉 우는 여자는 백 프로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더라. 오히려 쌀쌀맞게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여자가 끝까지 기다린다던걸.”
내가 은정이에게 그 무렵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 또래들이 호기를 부리듯 기다리지 말라고, 떠나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러겠다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 사람 모두 묵묵히 술만 들이켰다. 나는 얼마쯤 지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앉아 있다가는 소변 대신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은 탓이었다.
그 선술집의 화장실은 좁고 긴 복도를 돌아가야 했다. 애꿎은 담배 연기만 뻐끔거리다가 밖으로 나온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춰야 했다. 문 앞에서 은정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와락 내 품에 안겨 왔다. 나는 잠시 멍해졌던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으스러질 듯 마주 안았다.
“사랑해, 은정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복도 너머로 들어서던 J가 우리를 발견하고 조용히 눈을 찡긋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그제야 나는 오른쪽 어깨 근처가 촉촉이 젖어 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은정이가 울고 있었다. 눈물을 보이는 여자와는 헤어질 운명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술을 마시는 내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우리는 그날도 함께 잤다. 은정이는 다음날 아침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내 곁에 머물렀다. 그것이 우리가 같이 잔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