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저녁노을이 졌네요.”
강영국은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야외에서는 해가 빨리 지기 마련이었다. 강변에는 이미 어스름한 기운이 내려서고 있었고, 핏빛 같은 주홍색 구름들이 야트막한 산자락들 너머로 사그러지고 있었다.
윤지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앞뜰로 내려왔을 때 그곳에는 오수연을 뺀 나머지 손님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잔디밭 가운데의 탁자도 인원 수에 맞게 새로 꾸며져 있었다. 먼저 와 있던 장은숙과 최진구가 길게 붙여 놓은 자리들 한켠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장은숙이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는 척을 했지만, 최진구는 인상을 찡그린 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들 맞은편의 박종태는 여전히 따분하다는 양 플라스틱 의자에 심드렁히 등을 기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몇 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김종수가 가장자리에 놓인 모닥불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불판 위에 고기를 얹자 치이익, 소리를 내며 한 움큼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냄새가 근사한데요. 앉으시죠.”
강영국은 윤지선에게 의자를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테이블을 돌아 건너편 장은숙의 옆자리로 향했다. 머쓱해진 강영국은 그녀와 마주보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 됐나 보군. 이제 슬슬….”
그제야 생각났다는 양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던 박종태가 문득 눈을 껌벅였다. 어둑어둑한 펜션 쪽에서 오수연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안 그래도 부르러 갈 참이었는데.”
오수연은 김종수를 쳐다보지 않은 채 조용히 대꾸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얘기해 줬어.”
박종태는 다른 사람이 누구였는지 묻지 않았다. 오수연은 남편과 강영국 사이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소매가 긴 셔츠로 갈아입은 그녀는 여전히 짧은 핫팬츠 차림이었다.
이윽고 잘 구워진 고기들과 함께 맥주가 날라져 왔다. 아이스박스에 담긴 시원한 병맥주들이었다.
“역시 바비큐엔 맥주가 제격이야. 자기도 마실 거지?”
술병을 딴 박종태가 오수연에게 잔을 내밀었다. 오수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영국은 윤지선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물끄러미 턱을 괴고 있던 장은숙이 그들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근데 처음 보는 분이 계시네요?”
자신을 가리키는 그 표현에 윤지선은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슬그머니 고개를 움츠렸다. 장은숙은 짓궂은 농까지 던지고 있었다.
“두 분이 꽤 잘 어울리시는 것 같은데, 혹시 강영국씨 파트너이신가요?”
“아닙니다. 천만에요.”
강영국은 윤지선을 돌아보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곤란해 하는 표정을 알아차린 그가 대신 말했다.
“이쪽은 윤지선씨입니다. 어제부터 여기 계신 손님이시구요.”
“어제부터요? 그럼 혼자 오셨나 보죠?”
장은숙의 입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피식 말아올려졌다.
“자자, 뭐 하세요? 이렇게 만난 것도 반가운데 한잔들 하시죠.”
마치 자신이 주인이라도 되는 양 박종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건배를 제의했다. 세 쌍의 남녀들이 술잔을 들어올렸다.
<토요일 오후 6시10분>
“음식들이 입맛에 맞으십니까?”
고기 접시를 가져온 김종수가 말했다. 그는 관리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듯 시종 예의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진구와 오수연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흡족한 얼굴이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분위기가 얼마간 누그러졌고, 그들은 각자 시시데데한 잡담 따위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낮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던 강영국조차도 조금씩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주 맛있는데요. 그러지 말고 종태씨도 같이 드시죠?”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강영국이 합석을 권했지만 김종수는 애써 사양하려 했다. 그러자 장은숙이 덩달아 끼어들었다.
“후후, 그래요. 적당히 해 두고 이리로 오세요. 굳이 손님 주인 따질 필요 있겠어요? 누구 못 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묘한 뉘앙스가 깔린 말투였다. 순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수연의 어깨가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아닙니다. 아직 고기가 많이 남아서요.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김종수는 침착하게 대꾸한 채 다시 불가로 돌아갔다. 오수연은 불안한 눈길로 김종수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그리고 장은숙은 눈치채지 못하게 그런 그녀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박종태는 게걸스레 맥주만 들이키고 있었다. 장은숙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오수연에게 물었다.
“수연씨라고 하셨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저…, 저한테요?”
“네. 두 분은 어떻게 만난 사이에요?”
오수연은 화들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랑 남편이요?”
“그럼 두 분이지 누구겠어요? 하여간 나는 갓 결혼한 부부만 보면 그런 얘기가 제일 궁금하더라.”
장은숙은 모르는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뜬금없이 던진 그 질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눈길을 모았다.
오수연의 귀 밑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이라는 양 쉽사리 입술을 달싹이지 못했다. 그때였다.
그녀 곁에서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후후후, 제가 뺏었죠. 저희 와이프를.”
<토요일 오후 6시20분>
“어떻게 만났느냐 하면 말이죠. 제가 이 사람을 뺏었습니다.”
오수연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벌컥컬컥 맥주잔을 비운 박종태가 자랑하듯 입을 열고 있었다.
“뺏었다…. 재미있는 말이네요. 무슨 얘기죠?”
눈꼬리를 가늘게 흘린 장은숙이 되물었다.
“당연히 딴 남자한테서 뺏었다는 뜻이죠. 원래 저희 와이프한테는 애인이 따로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저희가 처음 만난 건 2년 전쯤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서로 알게 된 거죠.”
“사내 커플? 직장 동료였나 보군요.”
“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직장 상사였죠. 그것도 한참 위의.”
다른 사람들이 의외라는 양 눈을 껌벅였다. 박종태는 거만해진 표정으로 탁자에 다가앉았다.
“뭐 조그만 회사였어요. 실은 저희 아버지께서 몇 군데 투자하신 사업체들 중에 하나였죠. 저는 기획실 이사였고, 와이프는 거기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었구요.”
비서, 라는 단어에 좌중의 시선이 새삼 오수연의 외모를 흘끔거렸다. 그들은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갸름한 얼굴에 동의한다는 양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님이라면 부잣집 도련님이시네요.”
장은숙이 비꼬았지만 박종태는 싫지 않다는 듯 히히덕거리며 대꾸했다.
“아무튼 저는 첫눈에 반했는데, 이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자기는 오래 전부터 사귄 애인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나요? 그래서 거의 1년 동안이나 쫓아다녔습니다. 임자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더 목 매달고 싶어져서 말이죠.”
재차 술잔을 채운 박종태가 다들 알지 않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그러다가 어느 날에 갑자기 저한테 묻더라구요. 뭐라더라…. 자기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느냐, 대충 그런 얘기였는데 저야 자신있게 대답했죠.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수 있다고요. 물론 접대성 멘트는 아니었습니다. 저한테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집안이 달리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고나서 곧장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죠.”
박종태는 스스로도 만족스럽다는 듯 맥주를 홀짝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침을 튀기고 있는 내내 아내 오수연이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애인은….”
장은숙이 나지막히 뇌까렸다.
“어떻게 됐나요? 누구였는지 몰라도 안 됐군요. 그래도 박종태씨보다는 오래 사귀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5년인가 6년인가 됐다고 하던데, 알고 보니 고시생이었대요. 저희 와이프도 그때쯤 되니까 꽤나 지쳤던 거겠죠. 안 그렇겠어요? 비전도 없는 남자를 벌어 먹이면서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으니.”
탁자 아래에서 맞잡은 오수연의 손마디가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박종태는 마치 그 자리에 그녀가 없는 것처럼 떠들고 있었다.
“그, 그 얘기는 그만해. 종수씨.”
“뭐 어때? 어차피 다 지난 얘기잖아.”
오수연이 정색을 하며 나서는데도 박종태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옛날 남자란 놈도 바보죠. 낄낄낄, 그럴 바엔 차라리 돈이나 벌지. 하기야 그렇게 무능력하니까 몇 년이나 된 애인도 저한테 뺏긴 거겠지만요.”
오수연은 소스라친 낯빛으로 김종수를 응시했다. 박종태의 목소리가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였다. 그러나 김종수가 등을 돌리고 서 있기에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강영국이 말했다.
“결국 능력이 있는 남자가 승리한다는 건가요? 어쨌거나 미인 아내를 얻으셨으니 축하드릴 일이겠군요.”
“그렇죠?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박종태가 승자의 표정을 지으며 아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오수연의 몸이 가늘게 바들거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