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창보그룹 회장 장학민을 강남의 비밀요정 이원(梨園)에서 만났을 때 추가 대출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장학민이 현찰 2억 원이 들어있는 사과박스를 차에 실어주었거나 탤런트 이소영에게 극진한 접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창보철강은 대통령의 중요한 업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청와대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주거래 은행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은행도 그렇다는 말이오?”
김성준은 은행장 조민철을 쏘아보았다. 이소영의 나긋나긋하고 풍만한 몸뚱이를 생각하자 또 다시 하체가 묵직해져 왔다. 어젯밤에 이소영은 오로지 입만 사용해 그를 황홀하게 했다. 김성준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이소영의 아름다운 몸뚱이를 다시 한 번 탐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비치는 여자였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뚱이를 끌어안고 땀을 흘렸다. 한성은행에서 추가대출이 이루어지면 창보그룹은 수백억대의 정치자금을 바칠 것이다. 한국에서 언제 은행이 자율적인 판단으로 대출을 해주었던가.
“창보그룹은 빚더미에 올라 있습니다. 산하 계열사 중에 흑자가 나는 기업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영업이익으로 금융권의 이자를 갚는 것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조민철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업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내지 못하면 어떻게 기업을 유지해 나간다는 말이오?”
“창보뿐이 아닙니다.”
“다른 그룹은 상관할 필요가 없고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 창보 아니오?”
“부총리 각하, 저희는 더 이상 창보에 자금을 융자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 봐요. 은행 돈이 당신 돈이오? 창보를 부도 내겠다는 거야 뭐야?”
김성준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조민철을 쏘아보았다. 조민철을 한성은행장에 임명할 때 주위에서 반대하는 것을 무릅썼는데 배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창보그룹은 아직도 막강한 실세를 등에 업고 있었다. 은행장들은 창보그룹에 대출을 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중은행의 여러 은행장들도 임명될 때 창보그룹 회장에게 로비를 할 정도로 그는 집권 실세들과 밀접하게 지내고 있었다.
“창보에서 요구하는 돈을 지원하면 저희 은행에 500억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예금자들이 갑자기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하면 은행이 부도가 납니다.”
김성준은 조민철의 말에 경악했다.
“아니 어떻게 은행에 500억밖에 없다는 말이오. 그리고 은행이 부도가 난다는 게 무슨 말이오.”
“지난달까지는 은행에 5000억 원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달에 대부분 빠져 나갔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자금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가, 가만…. 그럼 핫머니가 빠져가고 있다는 말이오?”
핫머니는 단기 차익을 노리는 국제금융자금이다. 조민철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김성준은 은행장이 돌아가자 금융국장 윤세준을 호출했다.
“윤 국장, 한성은행에 돈이 없다고 하는데 한국은행에서 콜자금을 쓰게 할 수는 없나.”
“죄송합니다만 한국은행에 여유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한국은행에 돈이 없다는 말이야?”
“이미 시중의 여러 은행들이 콜자금을 끌어 쓰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어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부총리 각하,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외국 자본이 빠르게 국내에서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외국 자금이 빠져 나가?”
“예. 기업들은 외국에서 금리가 비싼 단기자본을 끌어들여 쓰고 있는데 신용이 높으면 연장을 잘해줍니다. 그런데 지난 7월부터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해 즉시 수입을 억제할 뿐 아니라 원화를 평가절하해야 합니다. 지금 환율이 800원대인데 당장 1200원대로 올리지 않으면 큰 위기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건 안 돼. 그렇게 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텐데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우리나라는 이미 경제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알았네. 좀 생각해 보세.”
김성준 부총리는 금융국장을 내보내고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뉘었다. 한국의 금융위기에 대해서는 외국 기관들과 국내 경제연구소에서 틈틈이 경고를 해왔었다. 특히 민간업체인 KG그룹 경제연구소의 조한우 소장이 언론사에 보낸 보고서는 경악할 만한 내용이었다. 한국의 외채가 800억 달러에 이르고 경상적자가 해마다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 수석, 한 번 만날 수 있겠소?”
“언제 말입니까?”
“오늘 당장이라도 좋습니다.”
“네. 청와대로 오시겠습니까?”
“아니오. 사람들 눈이 많으니 종로2가에서 점심을 듭시다. 이쪽에서 내가 손님을 두 사람 데리고 가겠소.”
“손님이요?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모르는 사람들일 거요. KG경제연구소 소장 조한우 박사와 연구원 이상희 박사요.”
“그 친구들 고의적으로 우리 경제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임한일 경제수석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KG경제연구소는 최근에 ‘한국 금융위기 도래’라는 보고서를 언론사에 뿌려 대통령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김성준은 그들의 주장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치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종로2가 한정식당은 점심시간이었으나 그들에게 별실을 마련해 주었다. 조한우와 이상희는 이미 도착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놀라운 미모를 가지고 있군.’
김성준은 이상희를 보자 눈이 부신 듯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늘씬한 몸매에 건드리면 톡하고 터질 것처럼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만지면 탱탱한 탄력이 느껴질 것 같은 둔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지난밤에 그가 껴안고 뒹굴었던 이소영보다 훨씬 세련되고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갑자기 오라고 해서 미안하오.”
김성준은 배를 내밀고 조한우와 악수를 한 뒤에 이상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상희의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호색한의 욕망 때문이었다. 이상희가 두 손으로 김성준의 손을 잡았다. 이상희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창보가 부실한데 위에서는 자금을 계속 지원하라고 지시하고 있소.”
임한일 수석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성준은 그들에게 창보사태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부총리 각하, 우리나라는 1년 안에 엄청난 위기가 올 것입니다.”
조한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는 진퇴유곡에 빠졌소. 돈은 없는데 위에서 창보에 또 대출을 해주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소.”
“혹시 소통령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상희는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누구라고 말해서 무얼하겠소. ‘나라 구하기 운동본부’가 아니라 ‘나라 망하기 운동본부’인 것같소.”
그 때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임한일이 도착했기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조한우와 이상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담의 안내를 받아 별실로 들어오는 임한일에게 인사를 했다.
“이쪽은 KG경제연구소 소장 조한우 박사이고 옆에는 이상희 박사요.”
김성준이 임한일에게 조한우와 이상희를 소개했다.
“나 임한일이오.”
임한일이 거만하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한우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임한일의 손을 잡았다.
“이상희입니다.”
이상희는 머리조차 숙이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악수를 했다. 그들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건강과 이상희의 위기론에 대해서 한담을 나누었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소설이 나왔어요. <대공황>이라는 책인데 우리나라의 위기를 그렸더군요. 대공황이 온다는 그 소설이 현실로 맞아떨어질 거예요.”
이상희의 말에 임한일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창보철강은 자기 자본이 900억밖에 안되는데 대출이 이미 5조 원이 넘어섰더군요. 그런데 정부에서는 추가 대출을 해줄 계획인가요?”
“민간에서 너무 정부 일을 깊숙이 알려고 하는 것 아니오?”
임한일이 경멸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한우나 이상희는 한낱 민간 연구소의 연구원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나이도 그들보다 훨씬 적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한 경력도 일천하다. 한국은 이미 세계가 주목하는 고도성장을 이루어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 OECD에 가입해 경제선진국이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