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태인가?’
조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풍만한 엉덩이를 실룩대면서 설거지를 하는 주애란의 뒷모습이 자극적이었다. 아랫도리로 짜릿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뭘 그렇게 봐요?”
조한우의 시선을 의식한 주애란이 뒤를 흘깃 돌아보고 눈을 흘겼다.
“술집 마담의 매력적인 엉덩이를 쳐다보고 있지.”
“뭐예욧. 자기 마누라를 술집 여자에게 비교해? 그렇게 나오면 밥 얻어먹기 힘들 걸.”
“흐흐흐….”
“어머머, 왜 그렇게 징그럽게 웃는 거야?”
“팜므파탈이야.”
“팜므파탈?”
“팜므파탈….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파멸에 빠뜨리는 요염한 여자.”
“호호호. 또 못된 생각 했구나.”
“당신이 팜므파탈인 탓이지 내가 음탕한 게 아니야.”
조한우는 바지를 벗고 껄떡대는 놈을 움켜쥐고 주애란을 향해 다가갔다.
“옴마! 뭐하는 거예요. 나 설거지 중이잖아?”
“당신은 설거지하고 있어. 내가 야수가 되어 줄게.”
“미쳤어! 미쳤어!”
주애란이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조한우를 마구 때리는 시늉을 했다. 조한우는 아내 주애란의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주애란은 선 채로 그에게 매달려 몸을 떨었다. 조한우는 그 순간에도 이상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정한 팜므파탈이라면 이상희가 아닐까. 아름답지만 독을 갖고 있는 여자. 남자들을 유혹해 파멸로 떨어뜨릴 수 있는 여자가 이상희였다.
“소장님, 국회의원에 출마하시죠.”
사무실에서 이상희가 그렇게 말했을 때 조한우는 깜짝 놀랐다.
“국회의원?”
“여당은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패해 야당이 될 거예요.”
“대통령선거가 1년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압니까?”
조한우는 이상희의 말이 황당했다.
“금융대란이 오는데 어떻게 여당이 집권을 하겠어요? 창보그룹이 무너지고 있잖아요.”
이상희의 말대로였다. 여당과 청와대 실세가 밀어주고 있는데도 창보그룹은 기어이 부도가 나고 말았다. 은행들조차 더 이상의 대출은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표시했으나 4개 은행이 1000억 원씩 추가 대출을 해주고 리스사에서 600억 원을 보탰는 데도 창보철강은 부도를 맞은 것이다. 조한우가 조사를 해보자 은행에서 대출한 자금이 대부분 일본의 핫머니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출해서 일본의 자금만 살찌게 해준 꼴이다.
‘창보그룹이 철강업에 진출한 것부터 무리였어.’
조한우는 창보그룹 사태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다고 생각했다. 창보그룹 사태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청와대 비서관이 구속되고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나는 몸통이 아니고 깃털이다’라는 말도 유행했다. 언론은 연일 창보그룹 사태를 대서특필하고 권력과의 유착관계를 폭로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창보그룹보다 정치권을 더욱 비난했다. 마침내 대통령이 사과 성명을 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몰아쳤고 조한우는 바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재정경제원 부총리뿐이 아니라 재벌그룹, 여당과 야당의 중진 의원들이 그로부터 자문을 받으려고 했다. 조한우는 언제나 이상희를 데리고 다녔다. 학계에서도 한국의 사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국회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창보 청문회를 열었다. 몇몇 경제학자들이 한국에 금융대란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한우는 국내 언론기관에도 금융위기를 경고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C 일보 경제부 박승준 기자가 조한우에게 전화를 걸어 질문했다. C 일보는 국내 최대 일간지였다. 기자들은 창보 청문회에 더 관심이 있을지 몰랐다.
“은행들이 지금 최악입니다. 기업들도 부채 비율이 1000%가 넘는 곳이 허다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뭡니까?”
“달러 유출입니다. 내년이 되면 바닥이 날 것입니다.”
“대책은 없습니까?”
“지금 원화 환율이 800원대인데 그렇게 하면 망하는 거 아닙니까?”
“한꺼번에 1400원대로 할 수 없으니까 900원대, 1000원대로 서서히 절하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정치권과 국민들이 각성하도록 크게 한 번 써 보죠.”
박승준은 그렇게 말했으나 조한우가 이틀 후에 신문을 보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왜 기사를 이렇게 작게 썼습니까?”
조한우는 박승준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데스크에서 경제가 불경기라고 나쁜 기사를 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건 국가 위기를 경고하는 일입니다. 국내 최고의 언론사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보도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소장님 보고서가 확실한 것도 아니고…. 신문은 일어난 일에 대해서 쓰는 게 속성입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박승준은 조한우가 부담스러운 듯이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호호호. 한국 기자들은 상황을 제대로 몰라요.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믿지 않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기자들, 불과 1년 후를 예측하지 못하는 관료들…. 천박하지 않아요? 사실 그런 사람들은 엘리트도 아니에요.”
이상희가 독설을 내뱉었다. 조한우는 이상희를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미묘했다.
“박사님, 박사님은 아침마다 기운이 넘치네요.”
주애란이 조한우를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박사님은 주애란이 만족했을 때 조한우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흐흐…. 우리 마누라는 어떻게 갈수록 요염해지지?”
조한우는 주애란의 희고 뽀얀 젖무덤을 한입 가득 넣었다가 뱉었다.
“호호호. 당신은 갈수록 듣기 좋은 말만 하네.”
주애란이 싫지 않은 듯이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면서 살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구소에 출근하자 직원들도 어수선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창보 청문회에 쏠리고 있었다. 국회와 언론사들은 창보철강의 권력 유착 문제를 캐기 위해 혈안이 되고 정부의 경제부처 장관들은 청문회에 끌려 나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창보철강은 시작일 뿐인데 너무 모르는구나.’
조한우는 정치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한심했다. 한국에 엄청난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도 정치권은 창보 청문회의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창보철강에 대출을 해준 은행들이 자금 압박을 받을 텐데….’
조한우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부총리 김성준에게서 집무실로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
“난 아무래도 청문회가 끝나면 물러나야 할 것 같네.”
조한우는 고뇌에 잠겨 있는 김성준을 보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여론이 격앙되어 있어서 대통령께서는 인사쇄신으로 국면을 전환하려고 하고 계시네. 우리 마음대로 대출을 해준 것도 아닌데….”
“물러나시면 편히 쉬십시오.”
“차라리 목숨을 걸고 창보철강에 대출을 해주지 말았어야 했어. 그러면 비굴하지는 않았겠지. 이제는 환란의 책임자가 될지 모르겠어.”
“어디 부총리께서 사태의 책임자입니까?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몸통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책임을 미룰 일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이상희 박사는 잘 있나?”
김성준의 말에 조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김성준이 이상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참 매력적인 여자야. 내 평생에 그런 여자는 처음이야.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지? 전화번호가 바뀌었나.”
“아닙니다.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귀는 남자가 있던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에게만 말하는 거지만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 그녀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 내가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겠나.”
조한우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기분이었다. 이상희가 가지고 있는 매력은 무엇인가. 왜 남자들은 그녀에게 불나비처럼 빠져들고 있는 것인가. 조한우는 이상희야말로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들을 파멸로 이끄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봄이 되면서 정국은 더욱 가파르게 굴러갔다. 조한우는 한국이라는 열차가 점점 파멸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