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대통령선거가 한창이지?”
다나카 미사토가 영어로 물었다. 그는 노인인데도 영어가 유창했다.
“네. 회장님.”
이상희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다나카 미사토의 손이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이상희는 얕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허리를 비트는 시늉을 했다. 그의 손이 은밀하고 도톰한 부분을 덮었다. 고약한 늙은이다. 이상희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다나카 미사토의 차는 이내 도쿄 시내로 들어가 긴자로 향했다. 긴자는 마치 서울의 명동과 같은 거리였다. 차창으로 일본인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는 것이 내다보였다. 다나카 미사토의 차가 긴자의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전통 일본식 오카베 2층집이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일본 막부시대에 문을 열어 300년째 가업을 잇고 있다는 최고급 요정 ‘아방궁’이었다. 다나카 미사토의 차가 도착하자 검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사내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문을 열었다.
‘야쿠자들이구나.’
이상희는 스커트를 단정하게 매만지고 차에서 내렸다. 사내들이 안내하는 건물로 들어가자 잘 가꾸어진 정원이 보였다. 분재를 한 소나무와 이름 모를 관목들, 향기를 뿜고 있는 화초들, 그리고 작고 아담한 연못이 하나 있었다. 길은 연못을 돌아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사미센 가락이 은은하게 흐르고 색색의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길옆에 서서 머리를 잔뜩 숙이고 인사를 했다. 블랙마리아를 비롯하여 세계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원탁회의 멤버들은 요정의 별실 가장 깊은 방의 다다미에 앉아 있었다. 다나카 미사토는 원탁회의 멤버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리차드 칼슨 옆에 앉고 이상희는 아랫방에서 인사를 했다.
“의장님, 이번에 한국에서 공을 세운 이상희 박사입니다.”
다나카 미사토가 의장에게 이상희를 소개했다.
“그래요. 지난번에 이야기를 들었지. 일을 참 잘 처리했어요.”
의장이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에 띠우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상희는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빠르게 원탁회의 멤버들을 살폈다. CNN이나 ABC 방송을 통해 자주 보던 국제금융계의 거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지?”
원탁회의 멤버 중에 유일하게 여자인 블랙마리아가 이상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그렇습니다.”
“여론은 어떤가.”
“한국에서는 선거기간 중에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론조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
“네. 현재 상황으로는 야당 후보가 5% 정도 앞서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야당이 여당을 이길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야당 대통령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패배를 하자 정계 은퇴선언을 했다가 다시 정계 복귀를 해서 신의가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겠군.”
“네.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가 요리하기 쉬울까.”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대통령후보는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나 주위에 있는 측근들은 독재와 싸우기 위해 투쟁만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리하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뜻인가.”
“네.”
“호호호.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군.”
블랙마리아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희가 그녀를 살피자 커다란 가슴이 출렁이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유난히 풍만한 것을 보면 성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오늘 도쿄에서 회합을 갖는 것은 카운트다운을 언제로 하느냐 결정을 하기 위해서요. 이상희 박사는 총명한 경제학자니 언제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9월에서 시작하여 10월에 매듭을 짓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한국 대통령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이번에 질문을 던진 것은 은발머리의 나이 지긋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여당 대통령후보는 아들의 병역문제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 낙선합니다.”
“한국 정부에서는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나?”
“경제부처에는 비상이 걸려 연일 대책회의를 하고 있지만 대통령에게는 보고가 올라가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의 중대한 문제가 어떻게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오.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에게는 인의 장막이 있습니다.”
“결국 둑이 터져야 보고를 하겠다는 것이군요.”
블랙마리아의 말에 좌중에 잔잔한 웃음이 터졌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무엇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의장이 좌중을 둘러보고 물었다.
“주식시장에서 철수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수십억 달러가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블랙마리아가 냉랭하게 말했다.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 한국 주식시장은 순식간에 폭락한다. 블랙마리아는 한국경제를 꿰뚫어보고 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수상각하께서 오셨습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의 말에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일본 수상은 게이샤의 안내를 받으면서 들어와 좌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이 사람들은 일본 총리까지 좌우하고 있구나.’
이상희는 원탁회의 멤버들에게 놀랐다. 일본은 원탁회의 멤버들을 무시했다가 10년 동안이나 불황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일본은 전 수상이 원탁회의 멤버들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뒤에야 국제 자본이 들어와 긴 터널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현 일본 수상이 원탁회의 멤버들에게 쩔쩔매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이상희가 서울로 돌아온 것은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이상희는 다나카 미사토와 하코다테 온천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서울의 경제부처는 연일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에 묻혀 경제위기는 조금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한국의 재벌그룹들은 갑작스러운 현금유동성 위기를 맞이하여 자금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은행은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하고 시중에는 자금이 고갈되었다.
“재벌그룹들이 난리입니다. 시중에 자금이 돌지 않습니다.”
김성준 부총리는 국장들의 보고를 받으면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것보다 외환보유고가 더 큰 문제입니다.”
“외환은 어떤 상황인가?”
“지금 70억 달러밖에 없습니다. 한 달 후면 20억~30억 달러밖에 남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지급불능 상태가 옵니다.”
“그렇다면 대책이 없나.”
“외국에 긴급 차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미국과 일본에 요청을 했지만 거절당하지 않았는가.”
“더 늦기 전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합니다.”
“불가능해. 벌써 대통령께 몇 번 말씀을 드리고 정치권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네.”
김성준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이제는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대통령선거 중에 구제금융을 실시하면 선거에 패한다는 이유로 어떤 일이 있어도 구제금융을 신청해서는 안 된다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대통령선거는 마침내 중반으로 들어섰다. 전국이 유세로 들끓고 신문과 방송은 온통 대통령선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국민들의 관심도 대통령선거에 집중되어 경제 문제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김성준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대통령 선거기간이라도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제금융? 그기 뭐꼬?”
대통령이 놀라서 김성준을 쳐다보았다. 김성준은 외환이 25억 달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경제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책상을 치면서 호통을 쳤다.
“대체 이기 무슨 일이가. 이런 일을 왜 이제서야 보고해?”
“각하,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합니다.”
“큰일났고마. 야들이 일을 와 이렇게 하노. 빨리 신청하그라.”
김성준은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치자 긴급히 미국으로 떠나 국제금융기구와 협의했다. IMF 총재 킹 그리치가 마침내 한국으로 날아왔다.
<블랙마리아 제1장 ‘제로게임-한국을 붕괴시켜라’ 끝. 다음호부터 제2장 ‘밤에 출근하는 여자’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