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느라고 이제 오는 거얏.”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화장을 하다가 말고 싸늘한 눈으로 오준태를 흘겨보았다. 오준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저녁은 차려서 먹어. 밖에 나가서 술이나 퍼마시지 말고….”
아내는 오준태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다시 화장에 몰두했다. 오준태는 방바닥에 벌렁 누워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화장을 하는 아내의 뒷모습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한 지가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최소 5~6개월은 되었을 것이다. 아내는 술에 취한 그가 반강제로 달려들 때야 마지못한 듯이 다리를 벌려주었다. 실업자 생활을 한 뒤로 그의 존재는 벌레만도 못했다. 밥을 얻어먹고 있는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얼굴에 처덕처덕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입술에 붉게 루주를 칠한 아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미니원피스를 입고 있다. 술집에 나가는 아내는 사내들의 눈을 홀리기 위해서 허연 허벅지를 드러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퍼 좀 올려.”
아내가 원피스를 머리 위에서 뒤집어쓰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 오준태는 말없이 아내의 원피스 지퍼를 올려주었다. 아내에게서 육향이 물씬 풍겼다. 결혼할 때 아내에게서 풍기는 이 냄새에 얼마나 황홀했던가. 그러나 이제 아내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미워하는 악녀로 변해 있었다.
아내가 적선이라도 하듯이 만 원짜리 한 장을 핸드백에서 꺼내 그에게 휙 던졌다. 소주나 한잔 마시라는 뜻이다. 오준태는 아내가 출근을 하자 밥상을 차려서 거실로 나와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틀어서 뉴스를 보았다. 뉴스는 온통 대통령선거와 IMF 외환위기에 관한 것이었다. 나라에 25억 달러밖에 없고 한국의 신용이 추락해 외국에서 상품거래가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선거가 한창인 데도 후보들이 초유의 사태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합의하는 등 온 나라가 대통령선거와 IMF로 떠들썩했다. 오준태는 마치 폭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엄청난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로부터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은 초토화되었다. 국민들은 매스컴에서 쏟아놓는 각종 경제용어에 넋을 잃었다. 그 중에 국민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금융위기, 경제대란, 대량실업이라는 용어였다. 기업들은 유동자금의 압박을 받기 시작하자 대대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부동산과 주식이 폭락하기 시작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도저히 부도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났다. 그것은 오준태에게 재취업을 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기랄, 정 안 되면 은행이라도 털지.’
오준태는 그 무렵 자포자기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오준태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은 대학 4년 동안 같이 하숙을 했던 김상복이라는 놈이었다. 건축과를 졸업하고도 몇 년 동안 빈둥거리며 놀더니 언젠가 만나자 ‘중원투자개발주식회사’ 상무 명함을 갖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데냐?”
오준태는 김상복의 명함이 이해되지 않았다.
“뭐하긴 뭘하는 데야, 부동산 거래하는 데지.”
“그럼 복덕방이냐?”
“인마, 무식하게 복덕방이 뭐냐.”
김상복은 복덕방을 회사 차원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 김상복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IMF가 터진 후 두 달이 되었을 때 전화가 왔다.
“오준태, 어떤 놈한테 들으니까 너 놀고 있다며? 나와라. 술이나 마시자.”
“업자가 무슨 돈이 있겠냐, 생각 없다.”
“인마, 내가 사겠다는데 무슨 헛소리야. 용돈벌이라도 하라고 부르는 거야.”
김상복은 명령조로 그에게 말했다. 동정을 해주는 체했더라면 아니꼬워서 나가지 않았겠지만 강압적으로 나오라는 말이 오히려 편안했다. 김상복이 말하는 곳에 나가자 뜻밖에 여자들이 넷이나 앉아 있었고 남자 셋이 마주앉아 있었는데 김상복이 혼자서 설레발을 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자들은 부잣집 부인네들인 듯 옷차림과 귀걸이를 비롯한 장신구들이 화려했다. 다만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여자들이었다.
“보십시오. 제가 조달하지 않았습니까?”
김상복이 오준태를 옆에 앉히고 너스레를 떨었다.
“호호호. 김 상무 능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내가 이래서 김 상무를 좋아하는 거야.”
40대 초반의 뚱뚱한 여자가 눈웃음을 흘리면서 맞장구를 쳤다.
“무슨 일을 하시나?”
“30대 초반밖에 안 되었겠지. 영계라, 누구는 좋겠어.”
여자들은 거침없이 야한 농담을 했다.
“이 놈은 건축기사입니다. 둘도 없는 친구죠.”
“이놈은 나하고 절친한 친구지만 괴물입니다. 대학 다닐 때 하숙집 아줌마를 따먹은 놈입니다. 조심들 하십시오.”
김상복의 말에 여자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오준태는 얼굴이 붉어졌다. 우라질 놈, 술 사준다고 부르고 아줌마들 앞에서 개망신시킬 일이 있나. 오준태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것을 의식한 김상복이 오준태의 무릎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자신이 지나친 농담을 해도 화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남자들도 오준태를 쳐다보면서 능글능글 웃었다.
“정말이에요? 어떻게 하숙집 아줌마를….”
여자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요?”
30대 여자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우리가 스물한두 살 때니까 그 아줌마는 40대 초반이었을 겁니다.”
“어머, 어머…, 어떻게 엄마 같은 여자를…!”
여자들이 새삼스럽게 오준태를 쳐다보았다. 오준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김상복은 오준태를 완전히 작살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이놈 말로는 하숙집 아줌마에게 따먹힌 거래요.”
“어머머! 웬일이니?”
여자들이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는 동안 내내 오준태와 하숙집 아줌마의 연애담이 화제가 되었다. 김상복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오준태가 하숙집 아줌마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것은 어느 여름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낮잠을 자는 아줌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선풍기 바람이 아줌마의 치맛자락을 날려 하얀 속옷 자락이 보였다가 말았다가 하는데 아랫도리가 팽팽하게 일어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숙할 동안 내내 이놈 반찬은 항상 고기와 계란프라이가 올랐어요. 우리는 왜 그렇게 하숙집 아줌마가 이놈을 좋아했는지 몰랐는데 방망이 덕이더라고요. 목욕탕에 가서 이놈 방망이를 봤는데 팔뚝만 해요. 완전히 야구방망이에요.”
김상복이 음담패설을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다. 아줌마들은 모두 몽롱한 표정이 되어 홀린 듯한 눈빛으로 오준태를 힐끔거렸다. 오준태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단란주점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오준태는 나이가 가장 많은 뚱뚱한 여자와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었다. 여자는 춤을 춘다기보다 취한 척하고 숫제 그에게 안겨서 매달렸다. 그런데도 여자의 살이 닿자 오준태는 아랫도리가 불끈거렸다.
‘내가 굶은 것을 알고 있나? 왜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오준태는 뚱뚱한 여자 때문에 숨이 차올랐다. 여자들은 10시가 되자 단란주점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뚱뚱한 여자는 오준태에게 살갑게 눈웃음까지 쳤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냐? 내가 아무리 업자라고 아줌마들 앞에서 개망신을 줘야 되겠냐?”
아줌마들이 모두 돌아가자 오준태는 김상복을 한 대 갈길 듯이 쏘아보면서 말했다.
“뚱뚱한 여자가 누군지 알아?”
“누군지 내가 알게 뭐야. 여편네가 달라붙는 바람에 진땀났어. 남의 유부녀를 따먹을 수도 없고….”
“새끼는…, 주는데 왜 못 먹어. 뚱뚱한 여자가 수백억 재산가야. 알기나 하냐?”
“그 뚱녀가 돈이 많은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못 생겨서 먹으려면 보자기 씌우고 먹어야지 그냥은 못 먹겠더라.”
“돈 벌게 해줄게.”
“뭐?”
“내일부터 우리 사무실에 나와라. 한 달에 200만 원이면 되냐?”
김상복의 말에 오준태는 다리에 맥이 탁 풀렸다. 봉급이 200만 원이면 감지덕지하고 친구놈 조수 노릇이라도 할 수 있다.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어?”
“우선은 따라다니면서 배워. 가불 해줄게 옷이나 좀 깔끔하게 입고….”
김상복이 지갑을 꺼내 10만 원짜리 수표 열장을 꺼내서 주었다. 오준태는 엉겁결에 수표를 받아들었으나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