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내가 왜 이렇게 착각을 한 거야?’
장은숙은 날짜를 착각한 자신에게 모멸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때때로 날짜를 잘못 아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쩔 수 없지. 내일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 왔다고 하는 수밖에.’
장은숙은 아파트 서류까지 가지고 나온 참이었다. 어차피 야구장에 들렀다가 남편을 만나서 서류를 전해 줄 생각이었다. 아들이 줄을 맞춰 운동장을 돌다가 장은숙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장은숙도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불쌍한 놈,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지 않았으면 한창 재롱을 부릴 나이인데. 장은숙은 아들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비도 오는데 뭣하러 왔어?”
남편이 장은숙의 곁에 와서 우울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내일 좀 바쁜 일이 있어서 하루 일찍 왔어.”
남편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 장은숙의 목소리도 날이 섰다.
“그럼 미리 전화를 하지.”
전화를 미리 하면 자신과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 이혼한 마누라 만나는 게 빚쟁이 만나는 것보다 더 무섭냐. 장은숙은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남편의 좁은 속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전화 같은 거 안 하는 거 알잖아?”
장은숙은 곱지 않은 목소리로 내쏘았다. 남편은 대꾸를 하지 않고 묵묵히 아들이 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은숙은 남편이 입을 다무는 것을 보자 가슴이 묵직했다. 공연히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했다. 운동장은 빗발이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
“그럭저럭….”
남편은 형편이 그다지 좋은 기색이 아니었다.
“현준이 데리고 가고 싶으면 데리고 가.”
남편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장은숙은 가슴이 철렁하여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인간이 자살이라도 하려고 작심했나. 아들만큼은 한사코 장은숙에게 보내지 않겠다고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그런 아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남편의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장은숙은 새삼스럽게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수염도 깎지 않은 남편의 까칠한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덮여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별 다른 일은 아니고 배나 탈까 하고 생각 중이야.”
“무슨 배?”
“원양어선을 타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고 해서 타 보려고 그래.”
“미쳤군. 그런 배를 타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남편이 타겠다는 배는 분명 대기업의 원양어선이 아니라 선원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수상한 고깃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배를 탔다가는 여차하면 물고기 밥이 된다. 지지리도 못난 인간. 남들은 IMF라도 잘만 사는데 왜 이렇게 살아. 장은숙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해야지 어쩔 수 없잖아.”
아이들은 운동장을 뛰는 것을 마치고 캐치볼을 시작했다. 장은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편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고 남편이 이렇게 된 것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포기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이제 우리는 남이야.”
“무슨 상관이야? 헤어진 마누라한테 도움을 받으면 어디가 덧나?”
괜스런 짓이었다. 남편에게 화를 발칵 내고 쏘아붙였는데도 오히려 제 눈시울이 시큰했다. 남편은 대꾸를 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기분이 나쁘면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은 남편의 오랜 습관이었다. 장은숙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혼한 남편이라고 해도 위험한 고깃배를 태우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피우는 담배연기가 구수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야구연습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단장이 사무실에서 나오더니 연습을 그만하고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엄마, 나 오늘 친구네 집에 가서 놀다가 자고 오면 안 돼?”
아들이 장은숙에게 달려와 환하게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들은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는 것이 좋은 모양이었다. 장은숙이 혼자 올 때보다도 훨씬 생기가 돌았다.
“아빠한테 허락받아야지.”
장은숙은 아들의 손을 잡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인데도 아들은 부쩍 자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 아침은 친구네 집에서 먹고 학교에 갈 거야?”
남편은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집에 와서 먹을게. 집까지 10분이면 올 수 있어.”
“그럼 그렇게 해라.”
“엄마, 안녕!”
아들이 장은숙에게 손을 흔들고 친구들을 향해 달려갔다. 아들은 뛰어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할 얘기가 있으니까 단장님에게 인사하고 와.”
장은숙은 아들이 멀어져 보이지 않자 남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남편이 시린 눈빛으로 장은숙을 보더니 단장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사방은 이미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장은숙은 남편과 함께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도 미워?”
“내가 사람들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거 잘 알잖아? 미워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그래도 다행이네.”
장은숙은 씁쓸하게 웃었다. 남편에게서 그녀에 대한 미움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우리 미워하는 것을 버리면 안 돼? 이혼한 지 벌써 몇 년이나 되었잖아.”
장은숙은 우산을 접고 남편의 우산 밑으로 들어갔다.
“왜 이래?”
“그래도 우리 한때 사랑하지 않았어?”
“벌써 옛날이야.”
“나는 그때 자기가 우산을 들어주면 너무 좋았는데….”
남편이 무슨 수작을 하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장은숙을 쏘아보았다. 장은숙은 혀를 날름 내밀었다.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인지 젊은 남녀들이 한 우산을 쓰고 장충단공원을 산책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어떻게 해?”
“뭐?”
“돈도 없고…, 여자도 없잖아?”
젊은 남자는 욕망이 일어날 때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남편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어쩌면 어두운 방에서 손으로 해결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남편의 팔꿈치가 장은숙의 풍만한 가슴을 찔러서 기분이 좋았다.
“언제부터 그런 것까지 걱정했어?”
남편은 대답을 피했다. 어쩌면 돈이 생기면 이발소 같은 곳에 가서 해결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장은숙은 공원을 나와서 남편을 데리고 먹자골목의 갈빗집으로 들어갔다. 장은숙에게 많은 돈이 들어오면서 남편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합치기 어려워.”
남편은 고기를 씹으면서 소주를 한 병이나 비웠다. 취기가 오르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장은숙을 건너다보았다. 장은숙도 남편과 합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남편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과 이혼을 한 뒤에 자포자기하여 만난 숱한 남자들을 생각하자 그녀는 너무 멀리 와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합칠 생각은 없어. 그냥 좋은 여자 생길 때까지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 우리가 부모 죽인 원수도 아니잖아?”
“친구라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해 줄게.”
장은숙은 자존심을 버리고 배시시 웃었다. 이혼한 남편에게 너그러워지고 있는 것은 아들의 아빠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연분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 너무 낯익지 않은가. 우리의 육체는 서로의 몸을 샅샅이 알고 있잖아.
“거기에는 섹스도 포함되어 있어.”
장은숙은 주위를 살핀 뒤에 속삭이듯이 은밀하게 말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