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숙은 숨이 턱에 차서 몸부림을 쳤다. 그러면서도 이혼한 남편을 생각하고, 헤어진 엄마 아빠가 합치기를 바라는 아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자 장은숙도 신이 났다. 일은 너무나 잘 풀리고 있었다. 이영훈의 회사는 코스닥에 상장하여 열흘이나 상한가를 때리고 있었다. 7억 원을 투자했는데 벌써 15억 원이 넘어가고 있었다. 두 달만 지나면 열 배 이상 오를 가능성이 충분했다.
‘마침내 대박이 터졌어.’
장은숙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영훈 회사의 부사장 직함도 갖고 있었다. 이상희로부터 저명인사들을 소개받을 때 명함을 내밀면서 저절로 어깨가 펴졌다. IMF로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어 거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기업가들이 자살을 하고 가정주부들이 아르바이트로 매춘을 하고 있었다. 몸을 팔아도 누구에게 파느냐가 중요했다. 사창가에서 팔면 창녀에 지나지 않고, 룸살롱에서 팔면 호스티스고, 재벌이나 권력자들에게 팔면 귀부인이 된다. 창녀나 호스티스는 몇 푼의 화대를 챙기지만 귀부인은 부와 권력을 얻는다. 장은숙은 상류사회와 하류사회의 차이를 실감했다.
그녀의 주위에 남자들도 많았다. 로버트 한을 비롯해 박인철, 정동일, 이영훈, 김동춘…. 이제는 이혼한 남편까지 그녀의 새로운 남자가 되었다. 장은숙은 자신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 남자들을 생각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흡사 여왕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이혼한 남편과 관계가 좋아진 것이 흡족했다. 장은숙은 그날 남편을 데리고 모텔로 가서 몸을 풀게 해주었다. 얼마나 굶주리면서 살았겠는가. 남편은 그녀 위로 올라오자 몇 번 용을 쓰는 체하더니 싱겁게 무너졌다.
‘에그 이래 가지고 어떻게 사내구실을 해?’
장은숙은 남편이 한심했으나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짓을 해왔는가. 한때는 까무러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적이 있지 않았는가. 헐떡거리는 호흡을 진정시켜가는 남편의 등을 껴안고 장은숙은 낯익음이 아늑하고 편안했다. 그의 밍밍한 살냄새, 점점 잦아드는 호흡소리가 기이하게 정겨웠다. 밖에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미안해.”
남편이 귓전에 낮게 속삭였다. 이혼하기 전에는 키스를 해주었는데 이제는 키스를 하지 않는다.
“미안해 할 거 없어.”
“자기도 했어?”
“몰라.”
장은숙은 차마 좋다가 말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장은숙이 그 말을 하면 남편은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남편은 배를 탈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기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너그러워진 것일까. 내가 아직도 이혼한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 했으면 해줄게.”
남편이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했다.
“해줄 수나 있겠다. 기운이 넘쳐?”
장은숙은 남편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웃음을 깨물었다.
“한 시간만 있으면 다시 해줄 수 있어.”
남편은 순진한 데가 있다. 이 인간이 키스도 안해 주고 뭐하는 수작이야. 장은숙이 대꾸를 하지 않자 그녀에게서 떨어져 일어나려고 했다.
“그냥 있어.”
장은숙은 남편의 등을 바짝 껴안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두 다리를 엉덩이에 얹어서 휘어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아직도 좋은 거야?”
“잘난 척하기는. 자기가 뭐가 잘났다고 좋아해?”
“맘에 없는 말 하지 마.”
“허튼 소리 그만하고 절대로 이상한 배 탈 생각하지 마. 그런 배를 타면 가만 안 둘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아파트 하나 준비했어. 자기하고 우리 아들 편하게 살라고….”
“또 주식하는 거야?”
남편이 고개를 들고 맹한 눈으로 장은숙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 하고 있어?”
“그런 거 알 필요 없잖아?”
“조건이 뭐야?”
“조건은 없어. 아니야. 가끔 내 말도 들어주어야 돼.”
“합치는 것은 더 생각해 봐야 돼.”
누가 합치자고 그랬어? 그냥 친구처럼 지내. 또 자기가 하고 싶을 때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 줄게.”
남편은 장은숙의 속내를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혼한 남편에게 아파트 사 주고 돈까지 주는 인심 좋은 여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섹스를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려와 주겠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튿날 장은숙은 남편의 통장으로 2억 원을 입금시켜 주었다.
‘나도 즐기고 있으니까 돈을 주는 거야.’
장은숙은 때때로 그렇게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이혼을 했어도 내 남자고, 내 남자니까 챙겨야 하는 것이다.
‘아유 나 죽겠네. 이놈이 숫제 야구방망이잖아?’
장은숙은 로버트 한이 힘차게 밀어붙이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속으로 연신 욕설이 튀어나왔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놈은 온갖 체위로 한 시간 동안이나 장은숙을 밀어붙이다가 마침내 폭발했다. 장은숙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이 야만인 같은 놈.’
로버트 한은 한바탕 땀을 흘린 뒤에 장은숙을 와락 껴안고 키스를 했다. 장은숙은 로버트 한의 품에 안긴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은 나에게 너무 소중해.”
로버트 한이 장은숙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장은숙은 온몸의 기운이 탈진하여 그의 가슴에 올라가 엎드렸다. 일이 끝난 뒤에도 늘어질 수 없었다. 그것은 남자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나도 당신이 좋아요.”
장은숙은 로버트 한의 넓은 가슴에 무성한 털을 만지면서 속삭였다. 여자가 남자를 감동시키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끝난 뒤에 속삭이는 말도 단단히 한몫을 한다. 장은숙이 로버트 한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은 그가 어쩌면 장은숙에게 많은 돈을 벌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은숙, 내일 고궁 관람할까?”
로버트 한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오전에는 일이 있어요.”
내일 오전 10시에는 이영훈의 회사에서 회의가 있었다. 이영훈은 코스닥 상장을 계기로 다른 e-북 회사를 인수합병하려고 하고 있었다. 남자를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적당하게 밀고 당길 때다.
“그럼 오후에 관람을 하고 저녁에는 미국 대사의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 어때?”
“나도 참석할 수 있어요?”
“물론이야. 은숙을 위해 드레스 숍에 전화를 해두었어.”
드레스 숍에 전화를 해두었다는 것은 평범한 드레스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 대사의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국제 비즈니스 사회에 데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래도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장은숙은 눈을 감았다. 야구방망이 같은 놈에게 한 시간이나 휘둘린 탓에 아른아른 잠이 쏟아졌다. 장은숙은 그날 밤 로버트 한의 아파트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장은숙이 눈을 뜨자 로버트 한은 커피와 계란프라이를 만들고 토스트를 손수 구워서 침대로 가져왔다. 장은숙은 그걸 맛있게 먹어주었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로버트 한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 전화를 하는지 영어로 침을 튀기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장은숙은 그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오후에 어떻게 하면 되죠?”
장은숙은 로버트 한이 전화를 끝내자 키스를 하고 물었다.
“광화문 앞에서 2시에 만나요. 5시에 드레스 숍에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대사관으로 가면 되니까.”
“그럼 2시에 만나요.”
장은숙은 로버트 한에게 손을 흔들고 아파트를 나왔다. 장은숙은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이영훈의 회사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로버트 한에게 경복궁 관람을 시켜주었다. 오후 5시가 되자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고 드레스 숍으로 갔다. 턱시도를 입은 로버트 한은 뷰티풀을 연발하면서 그녀의 목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진주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장은숙은 마침내 국제 비즈니스 사회에 데뷔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