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명동성당으로, 재정경제원으로, 은행 본점으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면서 시위를 벌였던 일이 허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은 일제히 5개 은행 퇴출과 합병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마치 무슨 대형사건이라도 터진 것처럼 흥분하여 방송을 하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귓전을 쟁쟁하게 울렸다. 정부가 기습작전을 전개하듯이 새벽 7시에 5개 은행 퇴출과 인수합병을 발표하고 퇴출은행의 전 직원에게 은행에 복귀하여 업무를 인수인계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린 뒤였다.
‘개새끼들.’
정희숙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은행 퇴출과 합병을 결정한 정부당국자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온 지 7년이었다. 그동안 참 부지런히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나이도 어느덧 스물다섯 살이었다. 교제하는 남자와 가을에 결혼할 예정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결혼조차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쏴아아아.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건물과 도로가 온통 빗줄기에 걸레처럼 젖어 있었다. 차들은 빗물을 튀기며 달리고 있었고 보도엔 색색의 우산을 쓴 사람들이 무심하게 오가고 있었다. 퇴출은행의 직원들은 업무 인수인계가 끝나면 모두 해고된다. 은행이 파산을 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대리 이하의 은행원들 상당수는 인수은행인 한양은행에서 고용승계를 하겠지만 절반 이상은 실업자로 전락할 것이다.
정희숙은 IMF가 오면서 실직자가 되어 우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라왔다. 그는 1년째 재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다. 건설업을 하는 그의 아버지가 대기업에서 공사대금을 받지 못해 도피 중이었다. 대기업의 위기는 하도급을 하는 중소기업의 위기였다. 은행이 파산을 하는 상태에서 대기업이 결제를 제대로 해줄 리가 없었고 하도급 업체는 결제를 받지 못해 부도가 나는 것이다. 정희숙은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아 남자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남자친구는 이자도 갚지 못해 그녀가 몇 달째 이자를 대신 갚았으나 이번 달에는 갚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도 신용카드로 인해 돈이 없었다. 은행에서 정희숙에게 독촉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남자 친구는 신용불량자였고 그녀도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위기에 있었다. 남자 친구의 빚보증까지 섰기 때문에 그녀는 파산 직전이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정희숙은 빗속에서도 로마병정들처럼 도열해 있는 경찰을 보면서 뇌까렸다. 은행에 들어가서 업무를 인수인계해 주고는 싶지 않았다. 문득 한양은행 전무인 김영택의 얼굴이 떠올라왔다. 그는 대통령과 같은 고향에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그가 고속으로 출세를 하는 이면에는 대통령의 사람들이 뒤를 봐주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나돌았다. 김영택은 얼렁뚱땅 사람들 비위를 맞추는 데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김영택은 정희숙이 은행에 처음 입사했을 때 같은 상도은행의 지점장이었다. 우스갯소리도 잘하는 활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한양은행으로 옮기더니 승진을 거듭하여 전무가 된 것이다. 몇 달 전 우연히 백화점에서 만났을 때 명함을 주었는데 전무라는 직책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놀러 와요. 내가 옛날에 신세 진 것도 있는데 갚아야지.”
김영택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었다. 정희숙은 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었기 때문에 송충이가 달라붙는 것처럼 징그러웠다. 김영택은 지점장으로 있을 때 많은 판공비를 썼다. 그때 정희숙은 지점의 총무일을 했다. 한번은 김영택의 판공비가 500만 원이 추가 발생했는데 김영택이 그녀에게 서류조작을 지시했다. 서류를 조작하여 어차피 부도가 나서 손실 처리를 해야하는 기업에서 500만 원을 회수하지 못한 것으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판공비를 규정 외로 과다하게 사용하면 문책을 당하게 된다.
“나중에 신세 갚을게.”
김영택은 얼굴에 비굴한 웃음기를 띠고 그렇게 말했었다. 정희숙은 그가 직장 상사였기 때문에 지시대로 서류를 조작했다. 서류를 조작한다고 해도 개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은행이 손실을 볼 뿐이었다. 은행에게 그 정도의 돈은 있으나마나라고 생각했다. 김영택은 얼마 후에 고맙다면서 속옷 세트와 화장품 등을 정희숙에게 선물했다.
‘징그럽게 무슨 속옷이야?’
정희숙은 당시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중년의 남자에게 속옷을 선물받은 것이 마치 자신의 알몸을 보여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전무님은 나를 도와줄지도 몰라.’
정희숙은 은행을 바라보다가 근처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114에 전화를 걸어 한양은행 임원실 번호를 알아냈다. 김영택이 준 명함은 은행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신호가 떨어지자 아가씨가 전화를 받았다. 아가씨는 기분 나쁠 정도로 꼬치꼬치 캐물은 뒤에야 전화를 바꿔주었다.
“미스 정이야? 미스 정이 나에게 전화를 걸구 웬일이야?”
김영택은 활달하게 전화를 받았다.
“전무님 한 번 뵙고 싶어요.”
“핫핫핫! 나하고 연애를 할 거야? 왜 갑자기 나를 보려고 그래? 그러잖아도 모처럼 점심시간이 비었는데 이쪽으로 와.”
김영택은 정희숙의 기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유쾌하게 떠들었다.
“본점으로요?”
“그래. 우리 본점 옆에 동강이라는 일식집이 있어. 내가 예약을 해놓을 테니까 12시에 만나. 안내하는 사람들에게 날 찾으면 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희숙은 전화를 끊었다. 김영택이 전화를 받아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김영택에게 무슨 부탁을 해야한다는 말인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지만 해고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그는 한양은행 전무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남자 친구 취직도 부탁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정희숙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슴이 돌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 두드려야 돼. 두드려야 문이 열리는 거야.’
정희숙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시계를 보았다. 아직 10시도 되지 않고 있었다. 정희숙은 커피를 주문하여 천천히 마셨다. 김영택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는 확실히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다른 지점장들은 파산 은행의 지점장들이기 때문에 이번 퇴출로 실직자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지만 김영택은 뛰어난 수단가가 아닌가. 정치권과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몰라도 IMF 상황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은 능력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시간이 일렀기 때문에 정희숙은 커피숍에서 30분 남짓 앉아 있었다. 그러나 젊은 아가씨가 마냥 앉아 있는 것도 뭣하여 커피숍을 나왔다.
커피를 마시고 나왔는데도 밖에는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기상청에서 호우경보를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희숙은 지하철을 타고 한양은행 본점으로 갔다. 일식집 동강 앞에 도착했는데도 시간이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빨리 도착한 것이다. 일식집의 위치를 확인하고 덕수궁 뒤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아도 한적한 덕수궁 돌담길은 고즈넉할 정도로 조용했다. 정희숙은 덕수궁 돌담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언니, 왜 출근하지 않아요?”
정희숙이 돌담길에 우두커니 서서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있을 때 같은 지점에 근무하던 오미영이 전화를 걸어왔다. 은행에 입사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아가씨였다.
“미안해. 몸이 아파서 그래.”
정희숙은 일단 거짓말을 했다. 정희숙 자신이 인수은행에 고용승계가 될지 안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도 인수은행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야기는 했어요. 우리야 말단 행원이니까 별일 없을 거예요. 언니, 내일은 출근해요.”
“나도 그럴 생각이야. 다른 사람들은 어때?”
“정희, 수경, 소영이 모두 출근했어요. 남자 직원들도 마찬가지고… 차장급 이상만 출근하지 않았어요.”
“내일은 출근할게. 전화해줘서 고마워.”
정희숙은 오미영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은행에서조차 해고를 당하면 갈 곳이 없다. 정희숙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서성거리다가 11시 50분에 동강으로 들어갔다. 안내하는 아가씨에게 김영택 전무의 이름을 대자 호젓한 방으로 안내했다. 아가씨들이 모두 생활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방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일식집답게 창호지를 바른 문, 벽에 걸린 기모노를 입은 여자의 그림 등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김영택은 도착해 있지 않았다. 정희숙은 얌전하게 앉아 거울을 보면서 파운데이션을 다시 바르고 입술의 루주를 손질했다.
“미스 정, 오래 기다렸지?”
김영택은 12시 10분이 되어서 나타나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깔끔한 잿빛 정장에 단정한 와이셔츠, 고급스러운 넥타이가 한눈에 잘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