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도 개량을 해서 꽃이 예쁘구나.’
주애란은 희디흰 꽃송이들을 살피면서 로맨틱한 상념에 잠겼다. 청춘은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도서관 앞을 오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주애란은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어느 정도 IMF를 극복해가고 있는 처지라 학생들의 얼굴에 절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IMF를 처음 맞이했을 때는 부자들이 조심해야 했다. 아파트값이 폭락하고 기업이 줄줄이 부도가 나고 가게들은 장사가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부자들은 돈을 쓰기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양이도 쥐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폭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IMF를 극복해 가고 있었다. 한국이 외환 유동성 위기를 맞이한 것은 일본이 막대한 핫머니를 일시에 빼간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의 회계가 투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부, 은행, 기업의 회계가 제대로 된 곳이 없었다. 당연히 구조 조정을 하지 못한 은행과 기업이 무너지고 그 여파로 국민들이 고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교수님, 어제 수고했습니다.”
김영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주애란이 얼음을 띄운 위스키를 두어 모금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김영택은 부총리 김동철과 골프를 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필드에 나간 거야.”
주애란은 콧대를 세우듯이 오만하게 말했다. 김영택 같은 야릇한 인간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부총리께서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야. 교수님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사정을 하더군. 실물을 보니 어때?”
주애란이 반말을 하자 금세 김영택의 말투도 바뀌었다. 김영택은 칠면조처럼 언제든지 얼굴을 바꿀 수 있는 인간이었다.
“운동을 해서 나빠 보이지는 않데.”
김동철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단단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눈이 서글서글하고 목소리도 소프트한 편이었다. 그런 남자라면 호텔에 가서 살을 섞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골프를 치면서 어떤 약속도 하지는 않았다.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오늘 전화가 갈지 몰라.”
“오든지 말든지.”
“내가 교수님이 호감을 갖고 있다고 했어.”
“누구 맘대로? 아주 뚜쟁이 노릇을 하는군.”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 준 거야. 요즘 그 정도 실력 있는 남자 드물어.”
실력이라… 실력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거야. 돈, 권력, 체력 모두 힘이 아닌가. 그런 것들은 대부분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부총리가 김 전무에게 무슨 약속을 했어?”
“은행장.”
“정말 가을 정기인사 때 은행장이 되는 거야? 공포탄 아니야?”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여?”
김영택은 언제나 자신만만하다. 자신은 새우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이면서 고래를 삼키려고 한다.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렇잖아? 막상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게 세상 일이야.”
“틀림없어. 내가 은행장이 되지 않으면 목숨이라도 내놓지.”
“호호호. 김 전무가 은행장이 되면 내게 좋은 일이 뭐가 있어?”
주애란은 김영택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할까. 사업에 성공하는 자들은 체면 따위는 따지지 않고 무서운 추진력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내가 육보시를 하잖아?”
“쳇! 대단치도 않은 물건을 가지고 무슨 육보시야.”
주애란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금요일 김영택과 만나서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녀는 대만족을 했다.
“거기에 옵션도 하나 있어요.”
김영택이 유머스럽게 말했다. 주애란이 김영택과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은 이런 유머 감각 때문이다. 남들을 웃길 줄 아는 것은 천부적인 능력이다. 김영택은 유머 코칭을 받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을 잘 웃긴다.
“옵션은 또 뭐야?”
“내가 은행장이 되면 교수님을 사외 이사에 앉혀 줄게.”
“좋아. 그 정도면 괜찮은 거래야.”
주애란은 노크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대충 마무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교수님, 2학기 강의 일정입니다.”
조교인 이옥순이 A4용지로 작성된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주애란은 안경을 밀어올리고 이옥순을 힐끗 쳐다보았다. 스물여덟 살, 재능이 있는 여자지만 눈가에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그것은 그녀의 생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처럼 고통스러운 탓일 것이었다. 이옥순은 시간강사인데 전 주임교수 밑에서 3년을 보냈고 주애란이 주임교수가 되고도 3개월이 되었다. 시간 강사로 보낸 3년이 그녀를 좌절하게 하고 지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주애란은 그녀에게 전임 자리를 마련해 줄 작정이었다. 학교에서는 이미 허락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아직 본인에게는 통고를 하지 않았다. 전 주임교수에게 충성을 바쳤는데 전임 자리를 얻지 못하고 그녀로 주임교수가 바뀌어 이옥순은 잔뜩 실망해 있었다.
“이옥순.”
주애란은 안경을 밀어올리고 보고서를 살피다가 이옥순을 불렀다.
“예. 교수님.”
주애란이 고개를 꾸벅해 보이고 나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원고 대충 손질해서 출판사에 넘겨.”
주애란은 경제경영서 추천사 초고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이옥순에게 주었다. ‘한국경제의 딜레마’라는 제목이었다. 저자가 유명한 필자였기 때문에 추천사를 써주면 그녀의 유명세도 동반 상승한다. 추천사 초고는 출판사 쪽에서 파일로 보내온 것이었다.
“네.”
“그리고 다음 주에 전임 발령이 날 거야. 학교에서는 이미 내정을 했고 곧 발표를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열심히 해.”
주애란은 이옥순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옥순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펴지면서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거하게 한 번 쏠 거지?”
주애란은 웃으며 이옥순을 쳐다보았다.
“그럼요. 교수님은 제 은인이에요. 금년에도 전임은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옥순의 눈에서 금세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울기는 왜 울어?”
“이번 주말에 제가 한 턱 내겠습니다. 우리 과 교수님들과 선배강사님들 모시고….”
“그러려면 돈이 적지 않게 들어. 내 경험에 의하면 한 200만 원 깨지더라구. 그러니 이걸로 해.”
주애란은 책상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이옥순에게 주었다. 출판사에서 추천사를 써주는 대가로 받은 돈이었다. 추천사는 책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에도 사용하기 때문에 제법 많은 금액을 지불한 것이다.
“교수님, 이게 뭐예요?”
“200만 원이야.”
“저 돈 있어요. 교수님.”
이옥순이 펄쩍 뛰는 시늉을 했다.
“너는 내 식구야. 시간 강사 하느라고 빚만 졌을 텐데 무슨 돈이 있어? 공연히 남편 들볶아서 돈 해오라고 그러지 말고 받아.”
“그래도 이렇게 큰돈을….”
“내가 선배이고 스승인데 그만한 것도 못해 주겠어? 선배 좋다는 게 뭐야? 내가 도움 받을 일도 많을 테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주애란은 이옥순을 내보낸 뒤에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남편 조한우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 날이다. 조한우가 무섭게 바빠졌기 때문에 좀처럼 저녁식사를 같이 할 여유도 없다.
“어? 언제 왔어요?”
교수실에서 나와 층계를 내려오자 조한우가 노타이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경쾌한 휴대폰 벨이 울려 전화를 받자 부총리 김동철이었다. 주애란은 남편 조한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