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에서 만났던 김동철입니다.”
김동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아, 네. 안녕하세요?”
주애란은 탄력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김영택이 은행장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판가름 날 것이다. 이것은 김영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화 받으시는 거 괜찮습니까?”
“네. 퇴근하는 길이라 상관없어요.”
남편 조한우가 옆에 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러면 자세한 말씀은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제가 교수님에게 완전히 필이 꽂힌 것 같습니다. 허허허….”
“호호호. 감사합니다.
김동철은 눈치가 빠른 인물이라 더 이상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이 꽂혔네, 어쩌고 하면서 수작을 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안해. 출판사 주간인데 추천사를 써달라고 해서….”
주애란은 거짓말을 하고 냉큼 조한우의 팔짱을 끼었다. 조한우는 주애란의 전화에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오래간만에 온 대학교의 건물들을 살피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주애란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차는 어떻게 했어?”
“술 마시려고 가지고 오지 않았어.”
“그럼 나도 두고 가야겠네.”
주애란은 조한우에게 더욱 바짝 매달리면서 가슴을 그의 팔꿈치에 갔다가 댔다. 그녀의 크고 풍만한 가슴이 조한우의 팔꿈치에 닿을 때마다 하체에서 짜릿한 전율이 일어나 전신으로 번져갔다. 조한우도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팔꿈치에 닿아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교수님이 이렇게 팔짱을 끼어도 괜찮아?”
“남편인데 뭐가 어때?”
“학생들은 내가 남편인지도 모르잖아?”
“호호호. 그럼 주애란의 남편 조한우라고 이마에 써 붙일까?”
주애란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쪽의 고풍스러운 인문학부 건물 위로 붉은 노을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대통령선거 캠프에 참여할까 해.”
여의도 12층에 있는 한정식 식당의 룸에 앉자 조한우가 미간을 접으면서 말했다.
“누구?”
IMF 때도 대통령선거를 했는데 벌써 5년이 지났다는 말인가. 주애란은 비로소 대통령선거 기간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조태일…. 내가 경제 팀을 맡길 원해.”
“조태일이 당선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 당내 경선에서 이길 가능성도 없잖아? 경선에서 이긴다고 해도 야당후보가 지지율이 10%나 앞서 있구.”
조태일 후보는 오래 전부터 대선에서 유력한 후보로 꼽혀 왔지만 보수 진영에서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당의 지지를 받으려면 진보적인 색깔을 띠어야 하고 개혁주의자라는 사실을 실세들에게 인식시켜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현재 집권을 하고 있는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내세울 필요가 있다. 30년 동안 반독재, 반민주 투쟁을 해온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를 선택할 때 자신의 정책을 밀고 있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대통령선거는 바람이야. 경선에서만 이기면 야당을 뒤집는 것은 시간문제라구.”
“10%나 앞서 있는데 어떻게 뒤집어?”
“야당 후보는 아들들의 병역 문제가 아킬레스건이야.”
“병풍은 끝난 거 아니야?”
“끝났어도 새로운 증거가 드러난 것처럼 언론이 끝없이 떠들게 만들면 국민들을 세뇌할 수 있어. 게다가 세풍도 터트리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구속되지 않아?”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에는 허위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나도 소용없어.”
“그러면 경선에서 이기기만 하면 되겠네.”
“당신도 분석을 한 번 해봐.”
조한우의 말에 주애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부터라도 대통령선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이 출세를 하면 여자는 더욱 힘을 갖는다. 조한우가 출세를 하면 주애란도 막강한 파워를 갖게 될 것이다.
식당의 종업원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베이지색의 개량 한복을 입은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다. 조한우는 고급 전통주까지 주문하여 주애란과 나누어 마셨다. 한정식당 ‘초우’의 음식은 맛도 좋고 정갈했다. 조한우와 주애란은 정치 이야기를 접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음식을 먹었다. 종업원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민감한 정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지지하는 조태일 후보가 당선되면 당신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어?”
“최소한 장관 자리 하나는 주지 않겠어?”
“겨우 장관이야?”
“장관이 어때서?”
“흔해 빠진 게 장관이잖아?”
“그럼 나보고 대통령 하라는 거야?”
조한우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못할 것도 없지. 당신이 대통령에 출마하면 내가 매일 업어줄게.”
주애란의 말에 조한우가 피식 웃었다. 주애란은 조한우와 느긋하게 전통차를 마시면서 IMF가 처음 터졌던 몇 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평범한 중산층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완전히 상류사회로 진출해 있었다. 지금 먹고 있는 한정식도 1인당 8만 원이나 하는 식사로 회원제로 운영하고 있는 식당이다.
“우리 건배해요.”
주애란이 술잔을 들었다.
“호텔에 갈 거지?”
조한우가 술잔을 부딪치면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물었다. 호텔에 가자는 말은 사랑을 나누자는 말. 집에서도 얼마든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나 주애란은 좀 더 쾌감을 얻기 위해서 호텔을 이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호텔에서는 분위기 때문에 흥분도가 달라진다.
“얄미워.”
주애란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적당한 알코올 기운도 사랑에 도움이 된다. 한정식 식당에서 나오자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주애란은 조한우와 함께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자 조한우가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다가왔다.
‘나는 너무 행복해.’
주애란은 룸에 들어서자마자 허겁지겁 달려들어 그녀의 옷을 벗기는 조한우의 목에 매달려 그렇게 생각했다. 식욕은 충분하게 채웠고 이제는 성욕만 채우면 된다. 인간의 욕망은 식욕과 성욕이 아닌가. 그 두 가지가 만족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부에 대한 욕망이라든가 권력에 대한 욕망도 따지고 보면 식욕과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은 빠르게 뒤엉켜 사랑을 나누었다. 조한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에게 떨어져 누운 것은 30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조한우가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고 욕실로 들어가자 주애란은 가운을 걸치고 베란다로 나가서 김동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해요. 아까는 제대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어요.”
주애란은 욕실 쪽을 살피면서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닙니다. 제가 불쑥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지난번 필드에서는 너무나 즐거웠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교수님, 내일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내일 오전 중에 전화를 드리면 안 될까요?”
주애란은 일단 김동철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저는 언제 전화를 주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일 오전에 전화를 드릴게요.”
“그러십시오 교수님. 전화를 기다리겠습니다.”
“제 생각을 하시면서 주무세요. 저 붉은 속옷 입었어요.”
주애란은 전화를 길게 하지 않고 마무리를 했다.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는 말이다. 속옷이라는 한마디에 김동철은 바짝 달아오를 것이다. 그러나 샤워를 하고 있는 조한우가 알면 좋지 않다. 주애란은 거실로 돌아와 가운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조한우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몸을 담그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들어와.”
조한우가 주애란을 쳐다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 호텔의 좋은 점은 스위트룸의 욕조가 2인용이다. 주애란이 호텔을 선호하는 것도 2인용의 욕조 때문이다. 주애란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욕조에 들어가 조한우의 옆에 앉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