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김상호 의원이 줄기차게 회장님 면담 요청을 하는데 한 번은 만나야 합니다.”
그룹 부회장인 김태경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정행 회장의 한남동 자택 별관에서 이루어지는 저녁식사였다.
“김상호는 야당의 정치자금 담당이 아니오?”
이정행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김태경을 쳐다보았다. 이정행은 목이 뻣뻣하다. 교통사고 후유증이라는 소문도 있고 약품 남용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예. 지금 야당의 유력한 후보인 이정길 캠프의 자금담당입니다.”
김태경이 대답을 했다.
“이정길이가 대통령이 되겠어?”
이정행이 비웃듯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러자 동감이라는 듯이 가신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이정행이 웃으면 덩달아 웃고 이정행이 울면 덩달아 우는 것이 오성그룹 가신들이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하고 있지만 몇 개의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는 이정길이었다. 이정행은 이정길의 아킬레스건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본선이 시작되면 주가 조작사건이 터질 것입니다.”
“정민구는 어때?”
“정민구도 워낙 약한데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달라져?”
“정민구가 숨겨 놓은 딸이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사실이야?”
김태경의 말에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룹의 중요한 보고는 김태경을 통해 이정행에게 보고된다.
“아직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에 거의 근접한 것 같습니다. 정민구가 메인뉴스를 진행할 때 여자 아나운서와 일을 치른 것 같습니다. 한때 정민구가 이혼을 하고 그 여자와 결혼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 두 살짜리 딸이 있다는 소문입니다.”
“우리 쪽에서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해 봐. 소문인지 사실인지.”
이정행이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으로부터 온갖 악의적인 소문이 흘러나온다.
“예. 정민구의 주변, 특히 방송가 쪽을 샅샅이 캐보겠습니다.”
오성그룹의 정보망은 국정원보다 낫다는 소문이 있다.
“김상호 의원은 다음 주에 면담 날을 잡겠습니다.”
김태경이 다시 김상호에게로 화제를 끌고 왔다.
“만나면 분명히 돈을 달라고 할 거 아니야?”
“회장님이나 전무님은 절대로 정치 자금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합니다.”
전무는 이준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김상호에게 뭐라고 말해?”
“요즘은 소액주주들 때문에 정치자금을 각 계열사별로 사장들이 알아서 하지 회장님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십시오.”
“김상호가 다혈질이라는데 그냥 있을까?”
“김상호도 우리에게 신세를 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회장님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회장님에게 조금이라도 불손하면 정치 생명을 끊어 놓겠습니다.”
김태경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준기는 김태경의 말에 쓴 웃음이 나왔다. 오성그룹은 국회의원 하나쯤 정치 생명 끊는 것을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할 수 있다.
“너도 정치자금에는 일체 손을 대지 마라. 그러잖아도 시민단체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는데 정치자금까지 네 손을 거칠 필요가 없어.”
이준기에게 누구도 정치자금을 주지 말라는 이정행의 지시였다. 장차 오성그룹을 승계할 사람이니 여론의 몰매를 맞거나 법정에 출두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이정행은 선대 때부터 일본 기업가들의 흉내를 내왔다. 선대 회장은 일본 한신그룹의 흉내를 내어 해마다 일본에서 사장단 회의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정행 회장으로 바뀌면서 일본에서 사장단 회의를 하는 것은 사라졌으나 이준기를 항상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배석시키는 것은 기업 경영을 배우라는 뜻이었다.
“예. 아버지.”
이준기가 안경을 치켜 올리고 온순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이준기의 대인 관계는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앞으로 대선자금을 달라는 정치인들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대선자금을 줄 때 절대 기록을 남겨서도 안 되고 회장님이나 전무님이 내시면 안 됩니다. 또 도청, 녹음기, 휴대폰 등을 조심해야 합니다. 대선 자금을 주는 장면이 찍힐 수 있으니까요.”
조성우 변호사가 말했다. 조성우는 50대 후반이지만 눈매가 예리하고 항상 공부를 하는 타입이다.
“아무튼 이놈의 나라는 정치 자금을 주는 것도 문제야. 강제로 달라는 놈보다 주는 놈을 더 범죄자 취급하니….”
이정행이 혀를 찼다. 이준기는 저녁 술 자리가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호텔에서 친구들과 저녁 술 자리가 준비되어 있는데 아버지의 대선자금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지루했다. 그러나 가신들과 별관에서 하는 식사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기업을 하기가 싫다. 치열한 기업 경쟁에서 살아남기도 쉽지 않은데 정치인들 하는 짓은 비열한 양아치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정치자금을 주지 않으면 이런저런 이유로 골탕을 먹인다. 기업가를 검찰에 고발하거나 세무조사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무슨 일인가?”
이정행이 비서실장을 쏘아보면서 물었다.
“여당 최고위원인 장윤호 의원님이 오셨습니다.”
비서실장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이정행에게 쏠렸다.
“아니 그 사람이 집으로 왔다는 말인가?”
이정행이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사람이 예의도 없군. 집으로까지 찾아오다니….”
이정행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수저를 탁 놓았다. 좌중이 일시에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할까요? 돌려보낼까요?”
“집에까지 온 사람을 어떻게 돌려보내나? 용건은 뭐라고 그래?”
“회장님께 인사나 드리고 가겠다고 합니다.”
“인사 좋아하고 있네. 본관 뒤 온실에서 만나겠네.”
본관 뒤 온실에는 난을 가꾸는 식물원이 있었다. 이정행의 선대 때부터 그림과 골동품, 그리고 난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회장님,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
김태경을 비롯하여 가신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좀 기다려. 오늘 저녁은 불청객 때문에 버렸어. 가지 말고 술이나 합시다.”
이정행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이준기가 이정행에게 황급히 말했다.
“그래. 너는 돌아가라. 동창 모임이 있다고 그랬지?”
“예.”
이준기가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라. 집안이 편해야 밖에서의 일도 잘 되는 법이다.”
이정행은 무엇인가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으나 사람들 때문에 입을 다물고 나갔다. 이준기는 이정행이 나가자 비로소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아버지인 이정행 앞에서 숨을 죽이고 식사를 하자니 밥조차 제대로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가신들이 잔잔하게 웃으면서 회장님의 건강이 더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아첨기가 섞인 말을 했다.
“부회장님, 막내 따님은 바이올린을 하시죠? 지난 번에 바이올린 독주회를 연다는 기사가 신문에 크게 나왔더군요.”
이준기는 김태경 부회장에게 관심을 보이는 체했다.
“핫핫핫! 고맙습니다. 그러잖아도 전무님이 화환을 보내주셨다는데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김태경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진을 보니까 아주 미인입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김태경이 입이 벌어져 머리를 조아렸다.
“변호사님은 아드님이 Y대에 다니시죠? 벌써 2학년이겠네요. 장학생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이번에는 조성우 변호사를 향해 말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