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에도 블랙마리아가 개입돼 있다고?’
지난밤 술집에서 들은 조한우의 이야기가 얼핏 머리에 떠올랐다. 조한우는 조상들의 묘를 이장하면서 치밀하게 준비를 한 이재형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것도 블랙마리아의 조종이라고 귀띔을 해준 것이다. 블랙마리아는 국제 투기자본을 위하여 일을 하는 여자다. 그녀의 정체는 아무도 모르지만 한국에 IMF를 오게 한 뒤 헐값으로 은행과 주식을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챙겨 갔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져간 국부가 수조 원이 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에 경악한 것은 기종철이었다. 언론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10년 동안 한국은 양극화 논쟁으로 국가의 정책이 제대로 돌아간 일이 없었다.
“선배, 게임이 끝난 것 같아요.”
검찰 발표를 보고 있던 오미란이 슬며시 옆에 다가와서 속삭였다. 오미란의 몸에서 톡 쏘는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뚜껑은 열어봐야지.”
기종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몇 차례의 일문일답을 끝낸 차장검사가 회견장을 떠나자 기자들도 일제히 회견장을 빠져 나가느라고 어수선했다. 기종철도 데스크로 송고를 했기 때문에 노트북을 접어서 가방에 넣고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제 뭐했어요? 밤늦게까지 전화도 받지 않고?”
오미란이 따라오면서 볼멘소리로 물었다.
“술 마시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정민구 사람들 하고요?”
오미란이 팔짱을 끼자 물컹한 젖가슴이 팔꿈치에 닿았다.
“캠프 사람들하고 마셨어.”
정민구 캠프 사람들과 저녁식사 후 기종철은 조한우와 2차로 바에 갔다. 조한우는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들이 필패를 할 것이라면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종철은 조한우와의 술자리가 끝나자 강남에 있는 비밀 요정 향촌으로 최숙희를 찾아갔다. 그녀와 술을 마시고 호텔에서 잔 것이었다. 최숙희는 남자를 기분 좋게 해줄 줄 안다. 술값은 받지만 섹스에 대한 대가는 받지 않는다. 물론 기종철에게만 해주는 배려였다.
“저녁에 시간 낼 수 있어요?”
오미란의 눈빛이 끈적거렸다.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나요?”
오미란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눈빛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혹시 배란기는 아니지?”
“어떻게 알았어?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오미란이 깔깔대고 웃으면서 기종철의 어깨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회사에 들어갈 거야?”
기종철은 오미란의 허리를 안으면서 물었다.
“응. 선배는?”
오미란은 둘이 되자 애교 섞인 반말을 했다. 기종철은 오미란의 붉은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녁에도 정민구 캠프를 취재해야지.”
저녁에는 오성그룹의 후계자 이준기와 만나기로 되어 있다. 오미란과 만날 시간이 없는 것이다.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모텔로 가는 것이 어때?”
“지금? 어떻게 대낮에 그런데 들어가?”
오미란이 얼굴을 붉히면서 기종철의 팔을 꼬집었다.
“뭐 어때? 잠깐이면 되잖아?”
욕망이 일어났을 때 배설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몸이 무겁다. 기종철이 먼저 차를 끌고 주차장을 나왔다. 오미란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차를 끌고 기종철을 따라왔다. 서초동 검찰청사에서 동호대교로 오는 쪽에 고급스러운 모텔이 있었다. 차를 주차시키고, 방값을 지불한 뒤에 룸으로 올라가자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오미란이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종철은 뒤에서 오미란을 와락 끌어안았다. 오미란이 옅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반응을 보였다. 기종철은 오미란의 스커트 안에 한 손을 넣고 다른 한 손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선배, 나 홍콩 가게 해줘라.”
오미란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헐떡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기종철은 오미란을 침대에 눕히고 맹렬하게 대시했다. 오미란이 두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열풍이 뜨겁게 휘몰아쳐 왔다. 기종철은 열기에 휩싸여 오미란을 밀어붙였다. 서로에게 낯익은 몸이었다. 익숙하게 지냈기 때문에 절정에 도달하는 시간도 일치할 수 있었다.
“아아 너무 좋아.”
사랑이 끝났을 때 오미란이 두 팔을 벌려 힘껏 그를 껴안고 놓지 않았다. 기종철은 오미란과 함께 샤워를 한 뒤에 모텔을 나왔다.
정민구 후보 캠프는 완전히 흥분상태였다. 검찰을 성토하느라고 캠프의 모든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이재형 후보나 다른 후보의 캠프들도 초상집으로 변해 있었다. 선거 유세에 참여하지 않고 관망하던 박연숙도 화끈하게 이정길 후보 지원 유세를 시작했다. 신문사에 돌아와 데스크에 보고하고 정치부 기자 칼럼을 하나 쓰자 저녁 때가 되어 있었다.
“선거는 끝난 것 같은데 어때?”
파이오니아 호텔 커피숍에서 이준기를 만났을 때 그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검찰의 발표가 이정길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고 봐야지.”
기종철은 피식 웃으면서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이준기는 재벌가의 후예답게 귀공자풍이었다. 얼굴도 깨끗한데다 옷도 기품 있게 입고 있었다.
“더 이상의 변수는 없겠지?”
“없어. 이제는 내년 총선거를 준비해야 할 거야.”
이정길 후보는 며칠 후면 대통령선거에 당선될 것이다. 그러나 선거를 하는 동안 막대한 선거자금이 필요하게 된다. 이정길 후보는 오성그룹에 선거 자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기종철이 이정길 후보를 직접 만나 오성그룹에 전해달라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방송국이 필요해. 이정길 후보가 협조를 해줄지 알아봐 줘.”
이준기가 주위를 살핀 뒤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벌이 방송국을 소유할 수는 없어.”
기종철은 이준기의 말을 얼핏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성그룹 계열사가 소유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와 관련이 있는 회사가 방송국을 소유하면 돼.”
“어떤 방송국을 원하는데?”
“경성방송.”
경성방송은 경기 인천 지역에서 시청할 수 있는 지상파 방송국이다. 3년에 한 번씩 재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지난해에 허가를 받지 못해 방송이 중단되고 있었다. 그 방송국을 오성그룹이 소유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기종철은 어쩐지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성그룹이 오늘이 있게 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방송국은 쉽지 않을 거야.”
“대통령이 의지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야.”
“국민들은 재벌이 소유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어.”
“그건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
“그러면 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는 거야?”
“재벌이 권력과 싸울 수는 없어. 권력에 약한 것이 재벌이야. 방송국을 소유하게 해주지 않아도 지원은 할 거야. 다만 우리 그룹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니까 대통령이 들어주었으면 한다는 거야.”
“그래. 그럼 내가 너희 아버지 뜻을 이정길 후보에게 전할게.”
기종철은 이준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준기와 저녁식사를 하고 기종철은 이정길 후보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이정길 후보가 집에 와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기종철은 이준기와 헤어져 이정길 후보의 집으로 갔다. 그는 밤늦게까지 선거 유세를 한 뒤에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성그룹이 선거 자금을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후보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종철은 이정길 후보가 서재로 들어오자 정중하게 말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방송국입니다.”
기종철의 말에 이정길의 눈이 커졌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