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방식 변경 조치를 본격화하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사진=고성준 기자
일본 정부는 지난 4일 0시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가지 품목에 대한 한국 수출 승인 방식을 변경했다. 그동안 한국 수출에 대한 일본의 수출은 포괄적으로 진행됐고, 승인도 3년에 한 번 정도로 간소화 됐었다. 한국 기업은 사오기 편하고 일본 기업은 팔기 편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절차가 강화된 3가지 품목의 경우 계약 건별로 하나씩 승인을 받아야 한다. 최종 허가를 받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그동안 일주일이면 충분했지만 앞으로는 최대 90일 가량 걸릴 전망이다.
수출 절차가 강화된 품목은 접히는 디스플레이 등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기판 제작에 쓰는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반도체 기판을 깎아내는데 쓰는 ‘고순도 불화수소’ 등 총 3가지다. 이 품목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디스플레이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핵심 소재다. 일본 기업에 의존하는 비중은 포토레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가 약 80%, 불화수소는 약 40%다. 일본의 조치가 본격화된 지 일주일이 훌쩍 지난 최근까지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 “당장은 문제 없다”
하지만 복수의 반도체 업체 관계자들은 “당장은 문제없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의 조치가 처음 알려졌을 당시 긴장감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었지만 구체적으로 내용을 뜯어본 결과 애초에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일본의 조치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그동안 이번 사태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는 일본 정부에 전략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지만 당장 심각한 타격이 없어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3가지 품목 가운데 특히 별다른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 건 ‘포토레지스트(감광액)’다. 이 품목은 국산 반도체의 주력인 D램을 생산하는데 쓰인다. 현재로선 일본 외에는 대체할 수 있는 공급처가 없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 승인 절차가 강화된 이후에도 국내 업체들은 기존의 방식대로 일본에서 수입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수출 조치와 관련해 일본이 정한 ‘세부 규정’에 포함되지 않아서다. 포토레지스트와 관련한 세부 규정 항목을 보면, ‘1나노미터 초과 193나노미터 미만 파장의 빛에서 사용하기 최적화 된 소재’로 명시돼 있다.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D램을 생산하는데 쓰는 건 193나노미터의 파장이다. 낸드 플래시 생산에는 248나노미터의 파장이 필요하다.
일본이 세부 규정에서 193나노미터 ‘미만’이라고 범위를 정하면서 심각한 타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한 정부 관계자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도 국내 업체가 쓰는 소재와 세부적으로 특성이 달라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일본이 세부 규정을 정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고, 이 때문에 조치 초기에 국내 업계가 일본 측에 여러 차례 확인해야 했을 정도로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 일본의 목적은 다른데 있다
일본의 이번 조치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과 정부 당국자들은 애초에 일본의 목적이 다른데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당장 한국 반도체 업계의 공장 가동을 멈추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장기전을 예상하고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불화수소가 대표적이다. 다른 두 가지 품목과 달리 불화수소는 타격을 빗겨나가지 못했다. 다른 국가에서 수입을 해오면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업계 얘기는 다르다.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본은 불순물 함량이 0%에 가까운 고순도 불화수소 생산 기술력을 갖고 있다. 소수의 다른 국가가 비슷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만 화학제품인 만큼 공급사를 바꾸면 테스트 및 안정화 기간 등 시간이 필요하다.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이 국내 업체들의 ‘주력상품’은 그대로 두는 대신 차기 사업에 대한 조치를 취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개발 중인 ‘극자외선 기술’은 이번 조치만으로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두 회사는 10나노대 D램 개발과 관련해 세계에서 독보적으로 앞서 있다. 이 신기술에 13.5나노미터 파장이 필요한데, 앞서의 포토레지스트 수출 조치 세부 규정에 포함된다.
일본이 7월 한 달 동안 유예 기간을 둔 또 다른 조치는 긴장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국내 주요 업체와 한국 정부는 앞서의 3개 품목에 대한 조치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정부는 앞서의 수출방식 변경과 함께 오는 8월부터 수출을 할 때 허가 취득절차를 면제해주는 ‘화이트 국가(백색국가)’ 제도에서 한국만 제외할 계획도 함께 밝혔다. 현재 일본은 이와 관련해 자국 정관재계의 의견을 청취 중이다.
현재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화이트 국가다. 여기서 제외되면 수출 절차가 강화되는 품목이 현재의 3개 보다 훨씬 더 늘어나게 된다. 이 경우 반도체 업계뿐만 아니라 일본 소재 의존도가 큰 또 다른 산업인 수소차, 배터리, 로봇 등 핵심 신산업 전반에 영향이 미칠 수 있다. 대응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의 화이트 국가에 대한 수출 방식은 상당히 포괄적이라 세부 규정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일본 정부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어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30대 기업 대표들을 초청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상품무역이사회에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를 추가 의제로 긴급 상정하고 규제 철회를 요청했다. 법적으로 일본의 이번 조치가 자유무역에 위반한다는 점을 확인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WTO에 제소하면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최대 3년 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도체 및 차세대 신산업은 짧은 주기에 지속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최종 결론이 내려질 2~3년 동안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만큼 기업들의 타격은 불가피하다.
여기에 최근 일본 주요 매체들의 보도를 종합하면, 일본 정부는 이번 수출 관련 조치를 ‘규제’가 아닌 ‘변경’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게 아닌 단순히 절차를 변경하는데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한국에 적용했던 ‘화이트 국가’ 제도는 일종의 ‘우대 조치’라 기존 화이트 국가가 아닌 중국과 대만과 같은 수출 절차를 적용하는 것일 뿐이라 한국 정부가 WTO에 제소해도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한다. 입장 차이가 큰 만큼 법적 분쟁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익명을 원한 한 정부 관계자는 “일본은 규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한국 기업 입장에선 규제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는 이번 사안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장기전도 검토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정부는 WTO 제소 외에 외교 통상 채널을 가동해 국제 사회에 일본의 조치를 상세히 알리고 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최근 미국을 방문해 이번 일본의 수출 절차 방식 변경이 미국 산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설명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큰 손 고객’ 대부분은 애플, 구글, 아마존 등 주로 미국 기업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