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임 이후 산발적이지만 계속적으로 터져나온 크고작은 악재들로 노무현 정부에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4월17일 청와대 서열린 정부혁신 국정과제 회의에 들어서는 노 대통령. | ||
국정을 뒷받침해줘야 할 여당인 민주당은 오히려 사분오열돼 ‘딴죽’을 걸기 일쑤다. 노 대통령이 추구하려는 ‘대화의 정치’도 최근 국정원장 청문회를 고비로 벽에 부딪혔다. 게다가 나라종금 로비의혹사건으로 불거진 측근들의 금품 수수는 노 대통령의 주름을 깊게 만들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흔히 ‘허니문 기간’으로 불리는 취임 초기부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까닭은 무엇일까.
일단 노무현 정권의 위기는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정치공학적으로 취약한 지지기반이 첫 번째 위기의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민주당 일각과 호남지역에서 터져 나온 ‘호남 소외론’은 위기의 시발점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9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48.9%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맞상대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지지율(46.6%)과는 2.3% 포인트 격차. 불과 56만여 표를 더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특히 당시 지지율을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대선 승리는 광주, 전남, 전북 등 호남지역에서의 9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 당선=영남 후보를 지지한 호남의 승리’로 해석하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노무현 후보는 호남지역 정서를 상당 부분 대변하고 있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그러나 대선 이후 민주당을 둘러싼 상황은 급변했다. 대통령 당선 확정 3일 만에 23인의 서명파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당 해체, 인적청산’ 요구가 터져 나왔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라는 김원기 고문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은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라, 노무현 개인의 승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대선 승리 후 급격하게 몰아친 민주당 내 탈지역 바람은 호남의 눈높이로 보자면 ‘배은’에 가까웠다.
호남 민심의 이반을 초래한 데는 ‘대북 송금 특검법’의 공포도 한몫했다.
김홍업, 김홍걸 두 아들의 비리 등으로 임기 종반 비난의 표적이 되긴 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 민심의 오랜 지주였다. 퇴임 이후에도 아직까지 호남지역에서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평가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특검법 수용은 결국 호남 정서를 또 다시 자극했다. 김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고 있는 ‘특검법’을 노무현 대통령이 별다른 노력 없이 ‘공포’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호남을 중심으로 커져갔던 것.
▲ 안희정씨(왼쪽) 등 측근에 대한 검찰수사와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 으로 야기된 야당의 반발 등은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적지 않은 부담이다. | ||
당 개혁을 둘러싸고 내분과 ‘무기력증’에 빠진 집권여당 민주당의 현주소도 노 대통령의 운신을 가로막는 ‘무거운’ 걸림돌 중 하나다. 민주당은 노 대통령 당선 이후 ‘정당개혁’을 기치로 전국을 순회하며 토론회 등을 통해 ‘당 개혁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작 ‘당 개혁안’이 마련된 이후에는 지구당 위원장 폐지, 대의원 교체 등 시스템 변화보다는 인적 구성 변화에 초점을 맞춰, 구주류로부터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민주당 신주류는 4·24 재보선을 앞두고 개혁당과 연합공천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상향식 공천’을 정치개혁의 시작이라며 한껏 치켜세우던 개혁파가 지역 경선을 통해 선출된 민주당 후보를 애써 무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완패로 나타났다. 경기 덕양 갑에 연합공천한 개혁당 유시민 후보는 민주당 지지세력의 도움에 힘입어 가까스로 당선됐지만, 당선 직후 “이제 민주당은 끝났다”고 선언, 유 후보를 지지했던 민주당 출신 인사들의 반발을 샀다.
호남 출신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서울 양천을, 경기 의정부에서 패한 요인도 엄밀한 의미에서 응집력 강한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를 포기한 결과라는 해석도 나온다.
물론 25% 투표율에 50%에도 못미치는 지지율로 당락이 갈린 4·24 재보선이 제대로 민의를 반영했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유권자 8명 가운데 1명의 지지를 받은 것을 전체 유권자의 민의로 확대해석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와는 별개로 침묵한 절대 다수의 ‘함의’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개혁당과 민주당 신주류는 4·24 재보선 이후 ‘개혁만이 살길’이라며 ‘신당 추진’을 공개 추진하고 나섰다.그러나 민주당 신주류가 추진하는 ‘신당’은 ‘호남 소외론’에서 촉발된 민심 이반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PK 등 영남지역 정서가 아직까지 노무현 정권에 그다지 우호적으로 돌아서지 않고 있다는 점도 노무현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아울러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여론을 ‘잠재우고’ 있는 충청권 민심이 언제까지 공약에 숨죽이고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지난 4월22일 청와대 만찬회동 초대에 응한 김 전 대통령 을 노 대통령이 맞이하고 있다. | ||
노 대통령은 “뜻이 맞는 사람을 쓰겠다”며 청와대 비서진을 측근 중심으로 집중 배치했다. 호남 출신 정찬용 인사보좌관, 박주현 국민참여 수석 등을 기용했지만, 문재인 민정수석, 이광재 국정상황실장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부산 출신과 386 출신 측근들을 기용하기 위한 구색 맞추기라는 혹평도 뒤따랐다.
이후 단행된 조각에서도 ‘노무현식 발탁 인사’는 계속됐다는 평가다. 김두관 행자부장관, 강금실 법무부장관, 이창동 문화관광부장관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특히 이들 장관 인선은 검찰 및 언론 개혁 등을 위한 목적 지향적 장관 인선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인선 목적이 뚜렷한 이들 스타플레이어 장관의 활동상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정작 민생을 돌봐야 할 타 부처 장관들은 활동이 거의 없는 ‘무늬만 장관’으로 비쳐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최근의 국정원장 인선은 한동안 ‘밀월관계’로 유지되는 듯 보였던 대야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회가 검증했으면 됐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에 간섭하려 한다”며 국회 정보위원들이 만장일치로 반대한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을 밀어붙인 것은 ‘대북 송금 특검 공포’로 국회와 청와대의 관계가 상호협력 관계로 가리라는 전망을 전면 대치국면으로 되돌려 놓았다. 원내 과반의석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 야당과의 대치국면은 원만한 국정운영에 상당 기간 부담이 되리란 전망이다.
여기에 나라종금 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인 안희정, 염동연 두 사람에 대한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되면서 숨 돌릴 틈 없이 ‘초긴장 기류’가 이어지고 있다. ‘측근 수사’로 야기된 노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 이너서클의 붕괴 혹은 재편 가능성은 가뜩이나 지지기반이 취약한 노무현 정권을 더욱 ‘위기’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밖에 ‘이라크전 파병 동의안’ 처리를 계기로 정치권 외곽에 포진해 있던 노무현 정권에 우호적인 시민단체 등이 대거 돌아선 것도 노 정권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뾰족한 해법이 나오지 않는 북핵 및 경제 문제 또한 노 정권이 당면한 난국의 수위를 높이는 난제로 자리잡고 있다는 평이다.
취임 초기 각종 여론조사 지표상 노무현 대통령은 70% 이상의 국민들로부터 ‘잘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얻고 있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물론 일부 지식인 그룹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초반 평가는 높은 여론조사 결과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인사문제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현 정부가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
개혁을 기치로 출범한 노무현 정권이 정권 초기 ‘국민통합’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안팎의 혹평을 차분히 곱씹어 봐야 한다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정권의 불행이 정권 차원에 그치지 않고, 곧 국민의 불행으로 되돌아온다는 우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