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4년 6월14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향 하고 있다. 95보도사진연감 | ||
사실 부시 입장에서 보면 똑같다. 핵 개발 포기 약속을 저버렸고 미사일도 개발하고 있고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도 보유하고 있고 테러도 하고 테러 지원도 한 나라다. 김정일은 미국에 위협이 되고 한국 일본 등 주변국들에 위협이 되는 독재자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라크에서처럼 북한과도 전쟁을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난 94년의 일을 되짚어봐야 한다.
한반도의 핵 위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4년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전쟁의 위험이 다가섰다가 지나갔다. 북한이 1992년 남한과 합의한 남북기본협정과 한반도비핵화선언을 폐기하려들자 클린턴 행정부는 제한적인 북폭을 결정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핵 시설로 믿어지는 영변에 대한 제한적인 폭격을 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항공모함을 동해로 이동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전면전의 우려 때문에 북폭을 반대했다. 이 문제로 한·미 두 대통령은 전화로 이견조정을 했다. 무려 40분이라는 긴 시간을 통화하기도 했다는 것(아래 기사 참조).
당시나 지금이나 가장 위협적인 것은 북한의 포병이다. 94년 당시 북한의 포는 7천 문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이들 포대는 남한의 군사시설을 겨냥하고 있으며 서울도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미국은 북한의 보복공격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다. 북한은 전면전을 할 만큼 무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특히 북한의 포대는 거의 모두 지하에 은폐돼 있는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녹이 스는 등 작동이 안되는 포대도 상당할 것으로 보았다. 한국이 ‘서울이 입게 될 타격’을 우려하는 데 대해서도 작동하는 장거리포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분석했다. 지하에 있는 장거리 포대들은 포문을 열기 위해 발사지점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거기 소요되는 시간은 2분30초, 이 시간에 포대에 타격을 가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북폭을 완강하게 반대했고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 설득에 애를 먹고 있을 때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방문이 결정되었다.
클린턴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로 카터가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 회담하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카터가 평양에 가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북한의 핵 개발을 막는 데 북폭 이외의 수단이 있을지 모르겠다. 기대는 않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로 그의 평양방문을 돕고 일단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카터는 남북 정상회담을 주선했고 김일성의 죽음으로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위기를 넘어섰다.
현재 북한의 핵 개발은 94년보다 더 진전돼 있다. 이미 핵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지난 4월23일 3자 회담에 참석했던 북한 리근 부국장은 “핵무기 보유”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국은 94년과 달리 북한의 핵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북한의 전력도 94년과는 다르다. 북한은 90년대 후반 전력을 현저하게 강화했다. 포병 전력도 2배 가량 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서울을 사정거리 안에 둔 포대는 170mm 주사포 3백여 문, 240mm 장사정포(다연장 로켓발사대) 2백여 문 등 모두 5백여 문을 보유하고 있다. 군인들도 모두 전진배치돼 있다.
리언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은 3월 중순 미 상원군사위원회 증언에서 “유사시 북한은 탄도미사일에 재래식 탄두와 화학무기를 탑재해 한국의 인구 밀집지역이나 군사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다”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선 한국에 배치된 신형 패트리어트 미사일 수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무튼 북한의 전력은 94년에 비해 현저하게 강화됐고 따라서 제한적 북폭 같은 건 이제는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 핵을 용납할 리 없다. 미국은 북핵문제를 반 테러전의 틀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니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지난 50년 동안 미국은 “한국에 대한 공격은 곧 미국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해 왔다. 94년도 핵 위기 때도 한·미 관계는 그런 틀 위에 있었다. 특히 집권 초기 YS정권의 대내외 신뢰도는 확고하고 높았다. 그러나 지금 한·미 관계는 예전 같지 않다.
핵 문제 해결 방법에서 한·미 간엔 의견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미국은 핵 개발을 막기 위한 가능한 모든 제재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데 반해 노 대통령은 어떤 제재도 반대하고 대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핵 개발을 반대하는 데는 한국도 주변국들도 같다. 그러나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할 수 있는가의 방법에서 미국과 한국 그리고 주변국의 입장이 다르다. ‘럼즈펠드의 메모’에서 보듯 미국이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기로 이미 내부적인 결론을 내린 것 같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의 북·미·중 3자 회담에 대한 시선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영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