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청남대 만찬회동서 자리를 함께한 노 대통령과 JP. 이날 양자 간 ‘선문답’으로 미뤄 노 대통령도 JP의 방북에 사전교감이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 ||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는 “조금 기다려봐. 앞으로 ‘큰 변화’가 있을 거야”라며 그 특유의 난해한 어법을 구사했다. 당시 자민련 의원들 중 누구도 JP 발언의 ‘진의’를 눈치 채지 못했다.
JP가 말한 ‘큰 변화’의 실체는 그로부터 20여 일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의 ‘방북’이었다. 정계에서 ‘원조 보수’를 대변하는 JP의 방북은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에 작지 않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JP의 방북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됐던 것으로, 그 이면에는 북핵문제와 북·일 수교 등을 둘러싼 남·북한과 일본, 미국 간의 고도의 정치게임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JP의 방북으로 한반도 문제 해법의 숨은 밑그림 중 일부가 드러난 셈이다.
지난 4월17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남대에서 3당 대표들과 만찬회동을 했다. 이 자리에서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노 대통령에게 슬며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노 대통령은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화답했다고 전해진다.
선문답 같은 대화 후 JP는 4월20일 갑작스럽게 일본을 방문했고, 사흘뒤 JP의 방북 계획이 알려졌다.
JP의 한 최측근 인사는 그의 방일 전 기자에게 ‘JP 방북’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귀띔했고, 그 연원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JP의 방북이 구체적으로 진행된 것은 지난 1월22일, JP가 당시 예정된 골프모임을 취소하고 급하게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이 측근 인사에 따르면 당시 JP의 방일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두 사람은 북·일 수교와 북핵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과 일본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에 따르면 북한은 북·일 수교와 북핵문제의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비공식 채널을 통해 일본측에 ‘한국의 거물급 인사 초청’ 의사를 전해왔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을 전후한 미국의 압박에 대비하고 심각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북한의 고육책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
그후 일본측에선 방북 인사로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와 박태준 전 총리를 거론했지만 북한측이 난색을 표시했다고 한다. 북한이 고려하는 ‘다목적용’ 인사로 이들이 적합하지 않았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 다음으로 일본측이 제시한 게 바로 ‘JP카드’였던 셈이다. JP가 방북 인사로 결정된 것은 북한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한반도문제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왼쪽), 고이즈미 일본 총리 | ||
따라서 북한이 JP를 초청한 것은 한국내 보수세력의 반발을 누그러뜨려 대북 경제지원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남북간 긴장을 완화시키는 ‘액션’으로 미국의 압박을 피해보려는 측면이 강하다는 관측이다. 나아가 JP가 한·일 수교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북·일 수교를 앞두고 식민지 지배 보상문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려는 측면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JP의 방북에는 사실상 일본측의 요청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JP는 1월 말 나카소네 전 총리 등 일본 정계 실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북·일 수교의 중재 역할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고이즈미 총리가 지난해 9월 평양방문 후 납북 일본인 문제와 북한핵을 외면했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자 나카소네 전 총리에게 타개책으로 ‘JP 카드’를 요청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JP가 노 대통령과의 청남대 회동 후 4월20일 극비리에 방일, 고이즈미 총리와 나카소네 전 총리를 연쇄적으로 만난 데서도 그의 역할이 북·일 관계의 중재에 비중이 있음을 추정케 한다.
한편 노 대통령과 JP가 사전에 ‘방북’을 놓고 상당한 교감을 나눈 것으로 알려지면서 노 대통령의 ‘대북 메시지’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청와대와 자민련은 ‘JP 특사설’을 모두 부인하고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노 대통령의 메시지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될 것이란 시각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 최근 정가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얘기가 ‘김정일 답방설’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과 관련된 노 대통령측의 언질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한 인사는 “JP의 방북으로 북핵위기가 완화되고 북한이 납북자와 이산가족 문제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일 경우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월 김원웅 개혁당 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해 오는 7월 제주에서 남북한이 ‘통일민족평화체육축전’을 개최하기로 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국내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JP 방북 결과 보수세력의 ‘환영’을 받을 수 있다면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한반도문제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정치·경제적으로 위기에 놓인 북한으로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통해 세계 여론을 환기시켜 미국의 압박을 피하고 경제지원을 이끌어내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답방이 이뤄질 경우 상징성을 띤 8월15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면서 ‘노심’(노 대통령의 심중) 여하에 따라 JP의 방북이 그 물꼬를 틀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