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 전시회에 한명숙 전 총리, 정세균 민주당 대표, 김원기 전 국회의장 등이 참석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지난 5월 6일 서울 영등포 민주당사. 한명숙 전 총리는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수락연설을 통해 ‘정권 심판’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미 예정된 승부였던 탓에 경선 자체는 다소 맥 빠진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지만, 6·2 지방선거를 정권 재탈환의 분수령으로 삼으려는 민주당과 한 전 총리의 의지만큼은 시종 뜨거웠다.
지방선거의 최대 승부처인 서울시장 선거전이 개막됐다. 앞서 5월 3일 나경원 의원을 누르고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를 확정지은 오세훈 시장에 이어 이날 한 전 총리가 민주당 후보로 결정됨에 따라 서울시장 선거 대진표도 확정됐다. 한나라당은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을 임명하는 등 선거대책위 구성에 착수했고, 민주당도 범민주세력을 아우르는 ‘매머드급’ 선대위 구성에 박차를 가했다.
민주당은 일단 “서울시장 선거만 이겨도 지방선거 승리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당 지도부가 직접 파행적 경선을 조장하면서까지 한 전 총리를 ‘옹립’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서울을 가져야 경기·인천 등 다른 수도권 광역단체장 선거에도 훈풍을 내려 보낼 수가 있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오 시장이 멀찌감치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지지율 격차가 최대 20%포인트까지 벌어진 여론조사도 있다. 지난 5월 4일 <중앙일보> 여론조사는 오 시장이 47.5%를 기록해 25.9%에 그친 한 전 총리에 21.6%포인트를 앞섰다. 나름 긴박했던 ‘체육관 경선’을 치른 데 따른 ‘컨벤션 효과’가 반영된 결과란 분석이다. 하지만 일반 여론조사에서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야당의 숨은 표 10%’를 감안하면 두 후보 간 승부는 성급히 예측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일단 야권단일화를 통한 선거 연대로 ‘1 대 1’ 전선을 구축한다는 복안이다. 한 전 총리는 경선 후보 확정 뒤 곧바로 서울시 야권후보 단일화 작업에 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 총리는 이날 수락연설에서도 “우리는 오늘 허위와 조작을 일삼는, 무능한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기 위한 큰 걸음을 내디뎠지만 민주당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필승의 길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해 ‘단일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다른 야당은 물론 시민사회 원로들과 연쇄 접촉을 갖고 진보세력의 결집을 호소할 작정이다.
이는 오는 5월 13∼14일 양일간 진행될 후보 등록 전 후보단일화를 이루겠다는 것으로, ‘수도권 빅3’ 차원의 시너지 효과도 고려했다는 지적이다. 인천은 진작부터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이 야권 후보로 확정됐고, 경기도도 민주당 김진표 최고위원과 국민참여당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오는 13일 단일 후보를 발표하기로 한 만큼 서울에서 연대가 성사되면 적지 않은 폭발력을 낼 것으로 민주당은 기대하고 있다.
또 당 지도부는 표 결집에 ‘정권 심판론’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서민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줬던 정권이 노무현 정권”(정몽준 대표)이라고 전 정권을 겨냥하기 시작한 한나라당에 민주당이 “이명박 정권 심판과 부패한 한나라당 지방정부 심판”(정세균 대표)으로 맞서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과 한 전 총리로선 무엇보다 ‘바람’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오는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가 중차대한 이유다. ‘노풍’이 거셀수록 노 전 대통령 장례식 때 눈물의 추도사를 읽었던 한 전 총리는 유리할 수밖에 없다. 급기야 노풍이 정권 심판론과 ‘화학반응’을 일으킬 경우엔 순풍에 돛을 달 수 있다. 물론 노풍이 보수 세력을 긴장시키며 한나라당 지지층을 선거장으로 불러오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없잖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향에서 ‘역풍’이 불 수도 있다. 천안함 침몰 원인이 북한 소행으로 밝혀지거나 북한 소행으로 추정된다는 정도의 결론만 나와도 선거는 한바탕 출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민군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지방선거 직전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남아공 월드컵도 변수다. 당장 국가대표 축구팀이 오는 5월 16일 에콰도르와 국내에서 마지막 평가전을 갖고, 노 전 대통령 1주기 다음날인 24일에는 한일전이 예정돼 있어 추모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핵심 변수는 한 전 총리 ‘본인’이라는 게 중평이다. 한 전 총리를 서울시장 후보로 만든 것은 개인의 권력의지나 능력보다는 ‘상황’이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실상 정계를 떠난 상태였다.
그랬던 그를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도록 자극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명박 정권의 검찰이었다. ‘정치보복’, ‘표적수사’ 논란 속에 진행된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계복귀에 미온적이던 그를 다시 정치 한복판으로 불러냈다. 검찰 수사로 ‘정치인생 최대 고비’를 맞은 한 전 총리는 “다시는 억울하게 정치공작을 당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며 선거 출마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러나 본게임을 앞두고 치른 당내 경선에서 적잖은 ‘내상’을 입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대중적 인지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그의 낙승은 불문가지였지만, 문제는 ‘결과’보다 ‘과정’이었다. 당내 경쟁자인 이계안 전 의원이 본선에 앞서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줄기차게 TV토론을 요구했음에도 그는 정면승부를 피했다. 가까스로 경선 파행은 면했지만, 한나라당으로부터 “TV토론도 못하는 후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한 전 총리가) 재판 승소 후 정책팀과 함께 서울시 시정에 대한 학습을 강도 높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본선에서 치러질 오 시장과의 TV토론에서는 진검승부가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예방주사’를 맞지 않은 한 전 총리가 향후 어떤 면역력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