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4일 오후 여의도 열린광장에서 수도권 야권 단일후보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한 한명숙, 유시민 후보.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하지만 ‘노풍’에 대한 한계론도 만만치 않다. 노무현 바람이 불면 반드시 그것을 견제하려는 균형 심리가 작용해 여권 보수층의 결집을 오히려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노무현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려 부단히 애썼던 민주당이 유시민 후보의 등장으로 ‘도로 열린우리당’이 될 가능성에 직면하면서, 야권 지지층이 분열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자칫 여권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컸던 선거전에 야권이 유시민발 노풍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이제야 지방선거의 진검승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유풍’이 불러온 노풍이 전국으로 몰아치게 될 것인지 추적해 봤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스토리텔링’이란 게 있다.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광고에서도 상품의 장점을 밋밋하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가공, 소비자에게 구매동기를 적극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스토리텔링은 한 인물을 대권에까지 끌어올리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바보’ 신화나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 신화도 그들의 삶과 정치역정이 스토리텔링으로 교직되면서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결과다.
한나라당의 한 친이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이제 대권 후보가 되려면 스토리텔링이 없으면 안 된다. 박근혜 전 대표는 ‘비운의 2세 정치인’이라는 누구도 갖지 못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정몽준 대표, 정운찬 총리,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등 여권 잠룡들의 스토리텔링은 약하다. 그들이 박 전 대표와 같은 카리스마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다. 이것은 박 전 대표의 경우처럼 스스로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이나 이 대통령처럼 자신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다. 앞으로 정치는 스토리텔링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정치에서 스토리텔링은 정책 전략 등을 뛰어넘는 일종의 ‘감성’ 블랙홀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이를 ‘유시민의 극적인 단일화 승리’에 대입해 볼 수 있다. 그는 0.96%포인트 차이의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제1야당이 아닌 미니정당 후보가 1000만 명이 넘는 광역단체장 선거의 야권후보가 된 사상초유의 사건을 만들었다. 당원 8000명이 30만 명의 골리앗을 넘어선 것도 경선 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들이다. 이런 ‘유시민의 기적’은 민주당 지도부를 큰 충격에 빠뜨렸지만, 밋밋한 선거에 이골이 난 유권자들에게는 톡 쏘는 양념거리를 던져준 셈이다.
그래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유시민의 스토리텔링’이 노풍을 견인, 전국의 친노 후보들과 연대해 또 다른 기적을 이뤄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수도권의 한 정치학과 교수는 유시민 후보의 기적 같은 승리를 지켜보면서 “유시민 바람이 있기 전까지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변수인 노풍은 한명숙 유시민 김두관 이광재 안희정 등 친노그룹의 각 후보들에 의해 따로 놀고 있었다. 각자의 노풍이 연결고리나 일정한 주제 없이 하나의 미풍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따로 놀던 노풍이 ‘유시민의 극적인 승리’라는 스토리텔링 과정을 통해서 합쳐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중도층과 지지 유보층들이 노풍을 밋밋한 바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후보들의 독주가 이어지는 결과가 초래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하나의 스토리텔링 연결구조에서 노풍을 바라보기 때문에 투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동기부여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노풍에 따른 진보세력의 잠재적 투표율 향상이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이에 대해 ‘지방선거 투표율이 50% 정도인데 친노 좌파 세력 중 20~30%가 결집해 투표장으로 달려가면 그들의 실질적 투표율은 50%에 육박하게 된다. 선거 구도는 나쁘지 않지만 선거 결과는 상당히 걱정스럽다’라고 우려하고 있다).
사실 유시민 바람이 있기 전까지 이번 지방선거에서 노풍은 그리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게 정치권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유 후보가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면서 이번 선거의 수도권 3곳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전 속으로 치닫고 있다.
▲ 왼쪽부터 이광재, 안희정, 김두관 후보. |
실제 유시민 후보의 단일화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수도권 여야 후보들의 지지율 격차가 좁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노풍이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방선거를 관통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시민 후보의 스토리텔링 바람이 지방선거를 정책대결이 아닌 감성대결로 이끌어갈 조짐도 보이고 있다. 이는 수도권 3곳 모두 현역 단체장을 후보로 내세운 한나라당에게는 최대의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한명숙 후보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검찰 수사 등으로 “정책 마련 시간이 조금 빡빡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70~71면 참조).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는 한 후보의 이런 ‘아킬레스건’을 포착하고 이번 선거를 정책대결로 이끌어 갈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유시민발 노풍은 이번 선거를 정책보다 바람과 감성의 전장으로 내몰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여기에는 유시민 후보 본인의 다분히 전략적이고 의도적인 ‘감성 정치’가 도사리고 있다. 독설로 유명한 유 후보는 전국적 지명도를 바탕으로 이번 선거의 전쟁터를 자신의 경기도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국 9곳에 후보를 내세운 친노 후보들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유 후보는 단일화 직후 “며칠 내에 내 지지율이 김 후보 지지율을 앞설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는 또 김문수 한나라당 후보 측이 자신에 대해 ‘철새와 메뚜기’로 비유하며 비난한 데 대해선 “철새와 메뚜기가 좀 억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서로 치열하게 다투고 경쟁하더라도 어느 정도 품위는 서로 지키는 것이 좋겠다”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처럼 그는 공격적인 언변과 정치적 쇼맨십, 명확한 태도, 대중적 인기와 전국적 지명도라는 정치인의 장점(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의 대권 주자 가능성에 대해 “좋은 재목이죠. 조금 다듬으면 말입니다”라고 한 측근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을 내세워 대중의 감성에 호소할 전략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기도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로서는 정책보다 바람과 감성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의 요건을 점차 갖춰가고 있는 유 후보가 민주당의 조직적인 지원마저 받을 경우 경기도지사 선거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전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특히 그가 방어적인 여당의 정책 아젠다에 말려들지 않고 ‘정치 선거’로 독자적인 판을 짤 경우 정권심판의 바람이 만만치 않게 불 전망이다.
하지만 유시민 후보의 ‘바람’이 오히려 야권의 분열을 부추기는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야권 일각에서는 그의 개혁당 창당 전례를 들며 그를 ‘습관적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며 맹비난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이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창당 등으로 민주세력의 지지기반 한 축을 붕괴시켜 결국 이명박 대통령 집권에 도움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유시민 후보가 그나마 ‘노무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겨우 통합의 길로 가던 민주세력에게 또 다시 분열의 가능성을 높여 준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유 후보의 좌우명은 ‘남에게 폐 끼치면서 살지 말자’라고 한다. 그런 그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자신은 물론 야권 전체에 커다란 정치적 타격을 준다는 점에서 ‘지나친 독선과 모험주의’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30만 당원이 8000당원의 대표를 위해 몸으로 뛰어줄지 의구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유 후보(8번)와 민주당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출마자들의 기호(2번)가 달라 표심의 단일대오(이른바 줄 투표 현상)가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 이는 박빙의 승부에서 민주당 후보들의 줄줄이 낙선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유 후보의 출마는 밑바닥에서 적잖은 혼란을 야기할 전망이다.
유시민 바람은 야권 분열과 함께 보수층의 응집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부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그의 파괴력을 우려하는 여권 보수층이 오히려 ‘뜨겁게’ 결집할 동기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6·2 지방선거는 이제 후보등록을 마치고 2주간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유시민 후보의 ‘노풍’은 ‘노무현 정신’에 대한 국민의 마지막 심판대가 될 것이다. 만약 그 바람이 성공한다면 이번 지방선거는 유시민 후보의 대권 드라마에 결정적인 스토리텔링이 될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