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박근혜 없이도’ 현상은 당내 가장 막강한 대권 후보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상황변화다. 만약 이번 지방선거가 수도권 전패로 끝날 경우 한나라당은 급속하게 ‘박근혜 당권-대권’ 구도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친이계가 중심이 돼 ‘서울 사수’로 선전하게 되면 박 전 대표의 당내 위상 추락은 물론 향후 대권 구도에도 ‘박근혜 대세론’의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친박 일각에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박 전 대표가 이번 선거에 관여를 했어야 지금의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라는 후회도 나오고 있다. 6·2 지방선거와 미묘하게 얽힌 박근혜 전 대표의 대권 방정식을 계산해 봤다.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찾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지난 2006년 지방선거 때 ‘선거의 여왕’은 당 대표로서 얼굴에 칼침까지 맞아가며 한나라당에 수도권 전승의 위업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박 전 대표는 유세 시작과 동시에 지역구 달성군으로 내려가 한나라당 군수 후보를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끊임없이 박 전 대표의 지원을 호소하던 수도권 후보들이 최근 들어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그 애절함은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여기에는 선거 판세가 여권에 우호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평가가 깔려 있다.
선거 초반 한나라당의 ‘수도권 3인방’(오세훈·김문수·안상수)이 여유 있게 앞서나갔지만,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의 ‘노풍’ 점화로 다시 그 격차가 좁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유세시작과 동시에 천안함 침몰사건 발표가 ‘북풍’을 이끌면서 야권 후보들의 약진도 주춤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선거를 10여 일 앞두고 한나라당은 “정부나 중앙당이 실수하거나 과잉대응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정두언 스마트전략위원장)라며 ‘부자 몸조심’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막판 야권의 대역전극을 우려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판세대로라면 그동안 우려했던 수도권 전패는 최소한 피하고 서울시장 1승에 경기도지사·인천시장 가운데 한 곳에서 박빙의 우세를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정두언 스마트전략위원장이 “서울만 이겨도 승리한 것”이라는 사전 평가를 내린 점을 감안하면 여당은 서울만 잡아도 선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여기에서 다시 박근혜 전 대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한나라당이 서울과 수도권 2곳 가운데 2승을 거두면 이번 지방선거는 ‘대성공’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선거의 여왕’ 박근혜 전 대표가 빠진 상황에서 ‘친이계’의 승리는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지난해 두 번의 재·보궐 선거에서 투표 막판까지 ‘박근혜’를 부르짖던 여권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번 지방선거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다. ‘박근혜’를 부르는 애절한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박 전 대표가 사전에 ‘선거 불개입’ 못을 박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권 지도부가 현 선거 판세가 그렇게 절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인 탓도 크다. 바로 여기에 박 전 대표의 전략적 실수가 포착된다.
사실 박 전 대표로서는 이번 지방선거에 마땅히 관여할 동기가 없었다. 공식 직함도 없는 데다가 세종시 수정안 정국으로 더 더욱 선거에는 발을 담글 계제가 아니었다. 여기에 자칫 패배할 경우 그 책임론으로 대권 행보에도 막대한 부담을 질 수 있다. 무엇보다 친박 내부에선 이번 지방선거에서 친이계가 패배하면서 고전을 해야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위상이 올라가 당을 갈등 없이 접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정권 중간평가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지방선거에서 친이 주도의 여권이 불리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계산은 선거를 불과 일주일여 남겨둔 현 시점에서 그렇게 맞아 들어가지 않고 있다. “차라리 선거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해 전리품을 확실히 챙겨야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우위를 점할 명분이 생겼을 것”이라는 친박계 일각의 후회도 이번 지방선거의 전략적 실수와 맥이 닿는 대목이다.
특히 친이계로서는 이번 선거가 ‘박근혜 없이도’ 이기는 최초의 선거가 될 경우 그동안 위축돼 있던 당권-대권 대결에서 힘의 우위를 점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다. 정치권 일각에선 친이계가 박 전 대표에게 유세 협력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며 엄살을 피웠지만, 실제로는 박 전 대표가 절대 협조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향후 책임론을 씌우기 위한 명분 쌓기용으로 그를 압박했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그리고 지방선거에서 친이계가 대승을 할 경우(최소한 2승) 친박계의 응집력에도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그동안 대세론 하나만 믿고 버텨오던 친박계 의원들이 ‘박근혜 절대주의’의 근시안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박 전 대표의 위상도 ‘탈레반’에 둘러싸인 소계파의 강경파 수장 정도로 떨어질 수 있다. 소장파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난 서울시당 위원장 경선과 서울시장 경선에서 계파 위주의 묻지마 투표에서 벗어나 ‘전략적’ 선택을 해온 현명한 한나라당 당원들이 ‘대세론’의 허상에서 빠져나와 박 전 대표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 전 대표 없이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그녀의 선거 신화를 깨는 현실적인 선택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한나라당 당원들의 ‘박근혜 신화 깨기’ 개연성은 박 전 대표의 당권 도전 및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승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친이계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그동안 경쟁자 없이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리며 미래권력의 정점으로 자리 잡았다. 당연히 힘쏠림이 생겼고 오만한 마음도 커졌다고 본다. 세종시 수정안 정국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이번 지방선거에서 겸허하게 전직 대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당원들의 신뢰도 더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대권을 의식한 나머지 지방선거도 정치적으로 해석해 발을 뺀 것이 아닌가 한다(한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 지지자들 가운데 70% 이상이 박 전 대표가 지방선거를 지원해야 한다’라고 응답한 바 있음). 아마 친박 측은 ‘너무 일찍 솟은 타깃은 일찍 격추되게 돼 있다’라고 생각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친이계가 ‘박근혜 없이도’ 지방선거에서 대승한다면 개헌을 비롯한 각종 정치 로드맵도 그들 나름대로 직접 운전할 ‘면허증’을 교부받는 셈이다.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이 컴백할 공간이 생기고 차기 대선 후보 경선을 관리할 당권에도 한 발짝 다가가게 된다. 반면 박 전 대표 세력은 더욱 소수정예로 오그라들어 경선에서 승리를 자신하지 못할 경우도 생겨 ‘탈당’을 결행할 위기로까지 몰릴 가능성도 있다. 이런 악재의 도미노 현상 그 첫 출발이 바로 지방선거의 ‘불개입’이었다는 점에서 친박계 일각의 ‘후회’는 뒤늦은 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나라당 친이계가 지난 2년간의 재보선처럼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패배(수도권 전패)할 경우 당은 급속도로 박 전 대표의 우산 아래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경우 박 전 대표의 절대적인 선거 영향력이 확인돼 일부 ‘박쥐’ 친이계의 투항이 이어질 수 있고, 2012년 총선 공천을 결정할 당권 경쟁에서도 확실한 우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박 전 대표도 친이계의 ‘참패’를 전제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발을 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무책임한 선거 방관에 대해 친이 진영이 더욱 노골적인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책임론’에 불이 붙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양 계파의 첨예한 갈등은 결국 이명박 대통령을 ‘통제 불능’ 레임덕 속으로 몰아넣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황금분할’이라고 할 수 있는 박빙의 승부가 날 경우다. 친이 친박 그 누구도 ‘승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어정쩡한 선거 결과를 들 수 있다. 친이계가 지방선거의 꽃인 서울시장을 내주고 경기 인천에서 승리하는 경우 또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빙으로 이기지만 수도권에서 참패를 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친이-친박계의 당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양측의 갈등은 2012년 대선 후보 경선 때까지 내연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괴롭힐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도 박 전 대표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다. 어차피 힘의 균형은 지나온 권력보다 다가올 권력 쪽으로 쏠리게 마련이기 때문에.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