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위기는 ‘실체가 없었던’ 2008년 촛불정국과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촛불정국은 일부 과격한 진보세력의 ‘준동’쯤으로 이 대통령이 치부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54.5%라는 ‘경이적’인 투표율에 서울 구청장 25개 중 21개 지역을 야권에 싹쓸이당한 것으로 상징되는 구체적인 지표는 이 대통령에게 ‘중도표방’ 정도의 위기탈출 꼼수가 아니라 근본적인 자기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가 내놓으려 하는 해답은 아직도 문제 자체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선거의 표심은 한마디로 “이명박 정신 차려라”로 요약된다. 그런데 청와대의 정답지에서 ‘이명박’이란 단어는 빠져 있다. 여권이 이번에도 지방선거에서 국민들이 던져준 문제의 정답을 뽑아내지 못하면 권력 재창출은 없다. 이 대통령은 ‘다음’을 위해서 자신을 ‘죽여야’ 하는 기로에 섰다. 지방선거 참패로 최대 위기에 처한 이명박 대통령의 탈출로를 짚어봤다.
6·2지방선거 ‘혁명’은 여의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여론조사 결과와 실제 결과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언론계는 물론 전문가집단도 민심 읽기에 실패한 셈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그중 하나는 신기루 같은 여론조사의 허상이다. 야당 성향의 ‘숨은 지지율’이 이번 선거에서 최대 10%까지 표로 발현되면서 박빙 승부의 지역에서 야당 후보들에게 반사이익이 많이 갔다. 이를 두고 최근 이 대통령의 미디어 장악 시도와 그에 따른 ‘공포정치’의 그림자가 유권자들의 표심 공개에 적잖은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또한 휴대폰 시대에 여론조사는 여전히 유선전화 방식을 고수, 표본추출에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도 많다.
‘압승’을 기대하던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아 혼자 관저에서 도시락 점심을 먹었다는 얘기도 전해질 정도다. 그렇다면 왜 이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을까. 첫 번째 원인은 바로 이 대통령 자신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지지율 50%에 취한 이 대통령과 그를 위시한 참모들은 선거 막판 “박근혜 전 대표 없이도 이긴다”며 스스로의 업적에 도취해 있었다. 당연히 박 전 대표를 찾지 않았고, 오히려 선거 압승 뒤 세종시·4대강·개헌의 3종 세트를 밀어붙이기 위한 준비운동에 들어간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던 셈이다.
이 대통령이 대선 캠프를 꾸리기 전부터 오랫동안 정무 전략가로 활동해온 한 인사는 이번 지방선거의 참패에 대한 질문에 대뜸 자신의 ‘주군’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 대통령이 크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동안 지지율 50%에 취해 너무 오만했다.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공천까지 세세하게 개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큰 줄기만 잡아주면 되는데 반장 역할까지 하게 되니 실무자들이 반대 목소리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옛날 캠프 전문가들 가운데 바른말 하던 사람들은 모두 자르고 ‘예스맨’만 곁에 둔 결과다. 일을 시키면 무조건 복종하는 만만한 사람들만 앉혀놓으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아니겠느냐. 참모들 백 번 바꿔봐라, 무슨 소용 있는가. 이 대통령이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하게 다가서는 길만이 정답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겠는가. 이미 이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룬 정치인인데 쉽게 오만함을 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대통령이 변하고 싶어도 자신을 둘러싼 강경파들 때문에 쉽게 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의 지방선거 참패에 대한 ‘이명박 책임론’에선 ‘지지율의 덫’에서 비롯된 오만함과 함께 또 다른 원인도 거론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9년 9월부터 이어져 온 세종시 수정안 정국의 실질적인 컨트롤 타워로서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고, 이번 천안함 정국에서도 안보 리더십을 적극 활용하며 정치 전면에 나섰던 것이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는 것이다. 정권 출범부터 포커스를 맞춘 경제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꾸준히 펼쳐 나갔다면 오히려 지방선거에서 정권심판론이 먹혀들 여지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시 수정안과 천안함 북풍 드라이브라는 ‘비전공’ 분야에 ‘올인’한 것이 이 대통령이 결국 지방선거에서 발목을 잡히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게 일부 여권 인사들의 지적이다.
그런데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번 지방선거의 의미를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6·2 지방선거가 한국정치 세대교체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이번 선거의 핵심 메시지는 정권심판론보다 세대교체라고 본다. 야권에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부적격자(이광재 강원도지사 후보를 지칭)를 포함해 김두관 안희정 후보 등 친노그룹의 젊은 층이 전면에 나선 것을 주목해야 한다.
▲ 정세균 민주당 대표 지방선거 당선자 등이 지난 4일 오후 봉하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박석묘역을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이 이번 참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는 점은 이 대통령의 일방주의에 대한 반성과 함께 뉴 리더 발굴에도 장기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를 트위터 등 대안 미디어가 ‘조·중·동’ 중심의 올드 미디어를 이긴 첫 사례로 꼽는 이들도 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전통 미디어가 주먹구구식의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지방선거 이슈를 주도했지만, 젊은 층들 또는 뉴 미디어에 익숙한 30~40대 부동층이 새로운 투표 트렌드를 형성해나간 결과가 이번 선거의 대반전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투표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감안하면 야권은 이미 차세대 대권 주자들을 만들어낸 셈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정권 심판론으로 참패한 데다 세대교체를 통한 차세대 주자 발굴에도 실패, 더욱 비전이 없는 ‘올드 정당’으로 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의 소장파 의원은 또한 “이번 지방선거는 차기 총선과 대선의 지형을 어느 정도 예측하게 한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투표 트렌드의 형성이 대권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 과연 이런 새로운 정치 지형에 맞는 한나라당의 대권주자들이 있는가. 오세훈 서울시장 정도가 나이상으로 맞지만 그는 16대 국회 때 정치를 시작한 구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김문수 경기도 지사는 말할 것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박근혜 전 대표다. 박 전 대표의 뿌리는 박정희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구시대 이미지가 강하다. 그가 과연 새로운 투표 환경이 태동한, 이번 지방선거와 같은 환경의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적합한 뉴 리더라고 할 수 있겠는가. 회의적이다. 이번 지방선거의 표심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견제와 함께 한나라당도 새로운 인물을 한번 찾아보라는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소장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지방선거 수습책의 제1번으로 바로 당 지도부의 면모 일신을 꼽고 있다. 당 주변에선 “영국 보수당이 선거 패배시 젊은 당대표를 내세워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던 만큼 한나라당 지도부도 젊게 바꿔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7월 전당대회에서 친이·친박계의 ‘우물 안 개구리’식 당권 경쟁을 지양하고, 끝장토론 등을 통한 세대교체론을 관철시켜 뉴 미디어 환경에 익숙한 40대 주자들에게 당권 경쟁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당에서는 여전히 인물난에 허덕이고 있지만,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의 절박함을 생각하면 도전해볼 만하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청와대 정무라인에서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만 나이로만 재단하는 것은 편협한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다”라며 신중한 입장이다.
지금 이 대통령에게는 각계각층의 고언과 조언이 쏟아지고 있다. 야권의 지방선거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당내 계파 갈등을 먼저 수습하라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양측의 관계가 봉합하기에는 이미 너무 벌어졌기 때문에 이 대통령이 꺼내들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다. 여기에는 선거를 거치면서 쌓인 친이계의 감정적 앙금도 한몫하고 있다. 전여옥 의원이 박 전 대표의 선거 역할론을 두고 “조용필이 동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격”이라며 지극히 냉소적인 시각을 보인 점에서도 드러나듯 양측의 화해를 통한 국정 운영 방식의 변화는 지난한 길이 될 것이다. 오히려 ‘친이직계를 중용해 난국을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높게 나오고 있다.
인적쇄신 요구도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청와대 A 수석의 거취가 그 강도와 범위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 주변에선 “A 수석이 이번에도 정신 못 차리고 버티면서 나가려 하지 않아 갈등이 높아지고 있다”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 대통령이 대야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는 어떤 정무라인이 들어서도 결정권자의 의지가 바뀌지 않는 이상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이 대통령 본인에게로 귀결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숨어서 말하는 참모들이 자리를 걸고 “대통령님 정신 차리시오”라는 직언을 해 사퇴했다는 뉴스는 과연 언제쯤 듣게 될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