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10월 1일 영국의 앤 공주가 과천 승마경기장에서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영국왕실 가족 중 필자와 가장 많은 접촉이 있었던 사람은 앤 공주다. 그는 한창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던 1980년대 필립 대공으로부터 국제승마협회장직을 승계받았다. 따라서 앤 공주에게는 서울올림픽이 회장으로서 처음 관장하는 올림픽이었던 터라 아주 중요했다. 물론 그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승마선수로 출전한 적이 있다. 당시 낙마한 것이 세계적 뉴스가 됐다. 서울올림픽 때 한국은 승마를 너무 몰랐고 대회를 치를 준비가 안 돼 있어 국제승마연맹이 애를 무척 태웠다. 필립 대공도 승마경기 준비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서울에 한 번 왔었다. 당시 워커힐호텔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한 기억이 난다. 준비가 워낙 안 돼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도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였다. 가장 기본인 변변한 말조차 없었다. 필자가 “한국에는 한 마리 200만 달러씩 하는 말은 없고 제주도 조랑말(donkey)밖에 없다”고 한 것이 외신에 크게 나올 정도였다.
위드머(Widmer)라는 국제승마연맹 사무총장 주선으로 앤 공주가 방한한 것은 내가 IOC 위원으로서 또한 서울올림픽조직위 제1부위원장으로 국제관계와 대회운영을 직접 총괄할 때였다. 내가 롯데호텔 만찬을 주최했는데 이례적으로 앤 공주가 인사말을 했다. 아무 것도 모르니 국제승마연맹의 조언대로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앤 공주의 조언을 전부 받아들여 대회준비를 했다. 국제승마연맹 말대로 40명의 연맹감독관들이 서울에 와서 경기장 준비, 말 통관, 검역, 수송, 경기운영 등을 도와준 덕에 무사히 승마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승마경기는 한양컨트리클럽, 과천경마장, 잠실주경기장 등 3곳에서 열렸다. 특히 폐회식 직전에 마장마술경기(Dressage·드레사지)가 주경기장에서 있었는데 장애물의 설치와 수거 등을 국제승마연맹이 직접 도와주었다. 참고로 서울올림픽은 폐회식 직전에 주경기장에서 드레사지가 열린 마지막 올림픽이 됐다. 바르셀로나부터는 복잡하다고 사마란치가 없애버렸다. 서울올림픽 때 앤 공주의 경호원이 권총을 휴대하는 것이 문제됐고, 이를 어렵사리 해결한 것도 기억에 난다.
앤 공주는 자기는 아동구호기금을 만들어 아프리카 아동들을 구호한다며 자기에게 점심 살 돈이 있으면 그 돈을 아동구호기금에 기부하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래서 롯데호텔 만찬에는 주한영국대사, 한국의 아동구호기금 이사장을 맡고 있던 최영희 전 육군참모총장, 이건영 마사회장(전 3군사령관),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도 초대했다. 어떤 만찬 때 김집 씨(후에 체육장관)가 메뉴지에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한 기억이 난다. 앤 공주는 아무 말도 없이 메뉴지를 돌려주었다. 다른 모임에서는 상관이 없겠지만 이는 영국왕실의 문화를 모르는 결례였다. 영국왕실은 사인을 안 해주고 여자들끼리 나란히 사진도 안 찍는다. 심지어 편지도 자기가 사인을 안 하고 시녀가 한다. 그리고 꼭 오렌지주스만 마신다. 나라마다 생활양식이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그래서 외교가 있는 것이다. 그 문화의 차이를 초월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외교가 할 일이다. 스포츠외교도 마찬가지다.
서울 IOC 총회 때 필자가 IOC 집행위원에 출마한다고 했더니 더 말하기도 전에 앤 공주는 “I am not to be lobbyed(나에게 로비하면 안 된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내가 그냥 친구로서 알려주는 것이라 했더니 웃으면서 “I know(알았다)”고 했다. 말없이 지지해준 것 같다. 94년 파리 IOC 총회 때 태권도의 올림픽종목 채택도 지지해 주었다.
이렇게 겉으로는 더없이 품위를 유지하고 차가운 것 같아도 프로토콜(Protocol·요즘 컴퓨터 용어로 많이 쓰이지만 본래 외교에서 의례 또는 의정서를 뜻한다)을 벗어나면 인간적인 면도 볼 수 있다. 서울에 왔을 때도 일반기로 왔는데 떠날 때는 영국에서 특별기를 보내왔다. 비행기 준비하는 동안 한참 비행장 마당에 서서 잡담한 생각이 난다. 얼마 후 로잔에서 오찬을 하면서 서울올림픽 승마경기 준비사항을 마무리 지었다. 40명의 임원을 미리 파견해 주기로 했다.
IOC는 1991년 버밍엄 총회에서 앤 공주 면전에서 승마의 세부종목을 두 개 빼버렸다. 그때 내가 집행위원으로 앤 공주를 거들었는데 막을 수가 없었다. 워낙 인기가 없는 세부종목이었기 때문이다. 사마란치는 앤 공주와 나의 우호관계를 알고 툭하면 “Your Friend”니 뭐니 하면서도 안 들어주었다. 서울올림픽 전인 캘거리 동계올림픽 때 앤 공주는 IOC 위원이 되고 곧 영국 NOC 이사장이 되었다.
▲ 1991년 필립 대공(위 사진),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자 부부가 인사를 나눴다. 아래 사진은 서울올림픽 기간 중 앤 공주 환영만찬을 했다. |
앤 공주와 친해진 것은 물론 서울올림픽 승마경기 공조에 기인하지만 그 뒷배경도 있다. 필자가 주영대사관에 근무한 경력, 영국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 영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1960년대에 이미 영국 의회를 견학한 인연 등이 밑바탕이 된 것 같다. 외교적 센스가 없거나 이를 경시하는 나라는 반드시 시들어 떨어진다는 것이 앤 공주를 통해 얻은 교훈이다.
앤 공주는 전통적 올림픽이념을 신봉하는 사람이라 상업주의와 프로 제일주의를 달리던 사마란치 위원장의 방침에 반대하는 의견을 여러 번 개진했다. 1995년 부다페스트 총회 때 IOC 위원장의 3선을 허용하는 헌장개정과 IOC 위원 연한변경 등에 대해 반대발언을 하다가 역부족을 느끼고 중간에 귀국해버렸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때는 재혼한 신랑과 같이 와서 무척 행복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몇 사람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IOC 위원 중에서는 필자 내외와 영국의 리디(Reedie) IOC 위원 내외가 있었다. 영국의 리디 위원은 GAISF에서 나와 같이 집행위원을 했고 2012년 런던올림픽 유치성공에 공이 많은 사람이다. 서울올림픽 때는 전시종목인 배드민턴의 국제연맹 회장이었고, 지금은 IOC 집행위원을 맡고 있다. 광주의 2015년 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에도 힘을 주었다. 최근에 나에 대해 2003년에 있었던 정치공세를 언급하면서 스포츠기구를 모르는 처사라고 개탄했다고 들었다.
필립 대공은 엘리자베스 여왕 알현 때도 옆에 있었지만 서울에 승마 회장으로 왔을 때와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바덴바덴(1981년)에서 같은 호텔(Belleview)에 있었다. 승마문제를 협의하러 버킹엄 궁에 갔을 때는 여왕 알현 때와는 달리 구석진 곳에 사무실이 있어 사이드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영국에 CCPR(Central Council of Physical Education & Recreation)이라고 대중, 오락, 스포츠를 전부 망라한 기구가 있는데 그는 이 의장을 겸하고 있었다. 굳건히 왕실을 뒷받침하던 필립 대공은 박식하면서 인격적이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체육활동에 앞장서서 일을 했는데 서울올림픽 직전에 앤 공주에게 바통을 넘겼다. 한때 IOC 위원설이 있었는데 안 하고 대신 앤 공주가 1988년 2월 캘거리에서 IOC 위원이 됐다.
참고로 사마란치에게는 하계종목 회장 네비올로(Nebiolo)와 NOC 연합회장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Mario Vasquez Rana)가 IOC 위원이 아닌 것이 제일 골칫거리였다. IOC 위원들에게 사정을 하여 NOC에서 한 사람, 국제연맹(IF)에서 한 사람만 당연직으로 IOC 위원을 시키자고 양해를 구했다. 올림픽 가족의 단결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네비올로는 1992년에 IOC 멤버가 됐고, 라냐는 1991년에 로게, 오스왈드, 바하 등과 같이 IOC에 합류했다. 당시 로게, 오스왈드, 바하까지는 정상적으로 선출되어 문제가 없었다. 특별 케이스이고 이미지가 좋지 않은 라냐가 문제였다. 라냐는 매일 나에게 졸라댔다. 원칙주의자인 앤 공주와 뉴질랜드의 우일슨 위원 등은 결사반대였다. 사마란치는 인사문제인데도 거수투표를 시키고 찬반투표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반대하는 사람은 손 들으라”는 공개 거수투표였다. 9명이 반대 거수를 했다. 그런데 찬성, 기권은 물어 보지도 않고 “통과되었다”고 선포했다. 정말이지 민주주의 원칙과는 거리가 먼 깜짝 놀랄 만한 투표방식인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IOC는 그만큼 유럽 중심의 사교클럽이었다. 앤 공주 등은 기가 막혀서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는 1974년 스위스 베른에서 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문제로 나와 격돌한 적이 있었다. 그는 1일 숙식을 10달러, 필자는 5달러를 제안했고 투표결과는 62 대 40으로 서울의 승리로 끝났다. 서울은 1978년에 반쪽이지만 최초의 올림픽종목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고 이는 서울올림픽 유치의 밑거름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즉위 이후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영국의 국모로, 정신적 지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은 명예혁명(1215년), 권리장전(1689)을 거치고 왕과 의회의 대결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의회정치가 자리를 잡았고 왕은 상징으로서 국가를 대표하고 국민을 융화 통합시킨다. 처음 만난 것은 배의환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을 필자가 수행한 1967년이었다. 소호(Soho)에서 10파운드를 내고 연미복을 빌려 입고 모자를 들었다. 영국 외무성 의전장이 대사관까지 와서 마차로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버킹엄 궁까지 안내했고, 거기서부터는 버밍엄 의전장이 안내를 맡아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았다. ‘(여왕이) 말 걸기 전에는 말하지 말 것’ ‘묻는 말에만 대답할 것’ ‘악수할 때는 너무 세게 손을 잡지 말 것’ ‘적당히 알현을 끝내고 나오되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 등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도 ‘어릴’ 때였다. 여왕은 “영국에 언제 왔느냐” “삶이 어떠냐” “무엇을 담당하고 있느냐” 등을 물었다.
그 후 1991년에 버킹엄에서 IOC 집행위원회와 총회가 열려 인사를 했고 그날 저녁에는 워윅(Warwick)성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공식 만찬이 있었다. 그때는 앤 공주가 NOC 위원장으로 환영사를 했는데 대견하게 딸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몬트리올올림픽 개회선언 때나 궁에서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질문할 때나 똑같았던 독특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워윅성에서도 여왕은 우리 만찬에 참석해 축사를 했는데 앤 공주처럼 옆에 앉은 사람들 하고는 별로 대화를 안했다.
이런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행히 서울을 방문했을 때 미동초등학교에서 어린이 태권도시범을 보아서 무척 기뻤다. 고고한 영국 여왕의 스케줄에 포함될 정도로 태권도가 크게 성장한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