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되는 산불로 군데군데 허연 속살을 드러낸 울산의 봉대산. 최근 1년 평균 10회 이상 산불이 났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곳곳에서 도사리는 감시의 눈초리를 느꼈기 때문일까. 지난 1월 8일 이후 불다람쥐는 봉대산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지난 3월 19일을 기점으로 부산 해운대구 장산에서 주말에만 연속 4주째 산불이 났다. 과연 부산 장산 산불도 신출귀몰한 불다람쥐의 소행일까.
또 불이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이번엔 반드시 잡고 만다. 소방대원들은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한 줄기로 피어오르던 연기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불은 바람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눈을 찌르고 어디선가 날아든 불꽃에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소방호스를 쥔 소방대원들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불’과의 사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불씨는 13시간 22분 동안 봉대산 10ha(3만 250평)를 태우고서야 비로소 잠잠해졌다.
봉대산 정상에 오르자 마치 누군가 산을 파먹은 듯한 흉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타버린 나무들은 베어져 밑동만 남아 있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나무들 역시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1년 평균 10번 이상 일어난 산불은 이처럼 봉대산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다.
‘불다람쥐’는 그 이름처럼 신출귀몰했다. 헬기가 뜰 수 없는 야간에 주로 불을 지르는 데다, 일반 등산로에서 떨어진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한 곳에 출몰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5월 13일 봉대산 등산로에서 기자와 만난 등산객 A 씨는 “매일 등산하면서 불다람쥐가 나타나길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본다. 산이 이 지경이 되도록 불다람쥐 실체를 파악한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라며 혀를 찼다.
단순 부주의로 산불이 일어났다고 보기엔 의심 가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13일 기자와 만난 동부소방서 하경호 대원은 “출화점이 두 군데 이상인 것만 봐도 그렇다. 한 곳을 진화하다 보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다른 곳에서 다시 불이 나기 시작하더라. 또 신고를 받은 즉시 출동했는데도 이미 불이 먼 곳까지 번지곤 했는데, 이는 방화범이 돌아다니며 불을 지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건조한 시기라 해도 마찰력 등을 고려해 볼 때 낙엽이 쌓여있는 곳에서 자연발화가 일어나긴 어렵고, 번지는 속도를 고려해도 담뱃불로 인한 화재로 보기 어렵다”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연속적으로 산불이 발생한 것도 방화범이 존재한다는 근거가 된다”고 덧붙였다.
불이 난 지점을 살펴봤다. 이상한 것은 2009년 발생한 화재의 3분의 2 이상이 현대중공업 뒤편 가파른 산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현대중공업 시설부 바로 옆 수풀에서 불이 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기자가 의문을 제기하자 하 대원은 “그 때문에 현대중공업 측에 요청해 화재 예방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면서 “아마도 그 지형이 일반인 출입이 어려운 경사가 심한 곳이기 때문에 방화가 집중적으로 일어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방화에 피해액이 총 80억 원에 달하자 이를 보다 못한 울산시와 동구청은 불다람쥐 검거에 포상금 3억 원을 내걸었다. 또한 40여 명의 산불 감시단을 곳곳에 배치하고 CCTV를 설치하는 등 ‘봉대산 지키기’에 적극 나섰다. 13일 기자와 만난 산불감시단 B 씨는 “요즘은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즉시 주민들이 신고를 한다. 등산객들도 담배를 가지고 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우리에게 알려준다”면서 “1월 8일 이후 더 이상 산불이 일어나지 않은 것도 다 주민들의 관심이 높아진 덕분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지난 4월 7일 환경정화 활동을 펼치던 회원들이 봉대산에서 수상한 이를 목격해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이 출동하자 수상한 사람은 착화탄 2개, 라이터 2개, 휴지뭉치가 든 검은 비닐봉지를 남겨둔 채 달아났다고 한다.
13일 기자와 만난 울산동부경찰서 관계자는 “증거물을 국과수에 넘겨 지문 감식을 시도했으나 ‘불능’ 결과를 받았다. 아직까진 그를 불다람쥐로 단정 지을 수 없다”면서 “형사들이 휴일도 없이 봉대산에 출동하며 애쓰고 있는 만큼 다시 나타나긴 힘들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12일 기자와 통화한 울산동구청 도시공원과 관계자 역시 “5월 15일까지로 규정된 산불조심기간이 지나면 초록 잎이 나오기 때문에 불이 쉽게 나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건조해지는 가을이 오면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민관이 ‘봉대산 지키기’에 총력전을 펼치면서 불다람쥐는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불다람쥐 재출현 소문이 나돌면서 관계 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장소만 이동했을 뿐 불다람쥐 소행으로 추정되는 산불이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산 해운대구 장산에서는 지난 3월 19일부터 주말에만 연속 4차례 산불이 발생했다. 인근 주민들은 봉대산 불다람쥐가 이동한 것 아니냐며 불안해 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12일 기자와 통화한 부산해운대구청 늘푸른과 여운철 과장은 “봉대산 불다람쥐가 장산에 출몰했다고 보긴 어렵다”면서 “봉대산은 산불이 야간에 집중됐지만 여기서는 오전 11시~오후 3시 사이에 주로 발생했다. 산불이 일어난 형태도 다르다. 봉대산과는 달리 등산로를 기점으로 반경 50m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관계 당국과 해운대구청은 불다람쥐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관계 당국은 300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산불감시원과 구청 직원들은 잠복근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쇄 방화 행각을 벌이고 있는 불다람쥐의 심리는 어떤 상태일까. 12일 기자와 통화한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연쇄방화범의 경우 불이 붙는 모습과 이를 보고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을 보며 쾌감을 얻는다. 자신이 한 일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를 기대하기도 한다”면서 “연쇄방화범은 불이 난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해 본 경험이 있을 확률이 높다. 잘 모르는 곳에서 연속적으로 불을 지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차량을 이용하기보다는 도보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특정 장소에 방화한 뒤 불이 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