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그를 “몸은 푸른 여름일 것 같은데 얼굴은 영락없는 가을인 남자”라고 말했다. 조각 같은 얼굴에 이국적이며 귀족적인 이미지, 잘 다듬어진 듯하면서도 야성이 깃들어 있는 임성민이라는 배우의 얼굴은 당대 최고의 비주얼이었다. 그는 신성일이나 남궁원 같은 1960년대 미남 배우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선배들보다 훨씬 댄디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임성민보다 멋있는 배우는 진정 찾아보기 힘들다.
1957년에 태어난 그는 1984년에 <달빛 멜로디>로 데뷔해 사후인 1997년의 <애니깽>까지 15편의 영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작은 스포츠였다. 중고등학교 내내 육상 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특기생으로 체육학과에 진학하지만 이미 운동엔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CF에 출연한 경험을 살려 그는 스무 살 때 동양방송(이후 KBS에 통폐합) 탤런트로 입사했지만 군 제대 후 돌아온 방송사에서 그에게 맡겨진 건 단역뿐이었다. 당시 에로티시즘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던 한국 영화계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문제는 키였다. 지금은 그다지 큰 키가 아니지만 당시에 182cm는 거인에 속했고 그는 번번이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28세의 늦은 나이에 만난 데뷔작 <달빛 멜로디>의 파트너 안소영은 <애마부인>(1982)으로 상종가를 치던 스타. 이후 2년 동안 임성민은 이른바 ‘벗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한 <장사의 꿈>(1985) 같은 ‘의미 있는 노출’도 있었지만 <무릎과 무릎 사이>(1984) <탄드라의 불>(1984) <색깔 있는 남자>(1985) <몸 전체로 사랑을>(1986) <됴화>(1987) 그리고 <애란>(1989)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은 그에게 섹스 심벌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다지 야한 영화도 아니었고 1980년대 대부분의 영화에 그 정도 노출은 있었지만 임성민의 육체는 조금 특별했다. 그는 당대 거의 유일한 근육질 스타였고 영화 속에서 항상 음모에 빠졌던 그의 육체를 치명적인 팜므 파탈들이 탐하고 있었다. 임성민은 그 어떤 액션과 대사 없이 그 존재만으로 섹슈얼했던 배우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에로틱 이미지를 곧 배반한다. 변신하지 못하는 배우는 단명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는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 1년 6개월을 쉬며 도예를 배우고 독서에 빠지면서 좀 더 성숙한 내면을 만들었다. 하지만 변신은 쉽지 않았다. 제작자들이 그의 에로 이미지를 부담스럽게 여긴 탓이었다. 개런티가 안 맞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TV로 향한 그에게 드라마 <노다지>(1987)는 전화위복의 기회였고, 이 작품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후 1991년엔 장미희와 출연한 <사의 찬미>로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4년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같은 문제작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1990년대에 그는 영화계를 떠나 주로 브라운관에서 활동하며 <폭풍의 계절>(1993) <사랑과 결혼>(1995) <고백>(1995) 등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에로티시즘의 1980년대가 가고 로맨틱 코미디와 액션의 1990년대가 왔지만 그는 충무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영화적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에로’는 그의 영화적 운명에 족쇄였고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속박이었다.
그가 진정 맡고 싶은 역은 조직의 보스 같은 악역이었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악역은 맡아 보지 못한 채, 1995년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간암이었고 노모와 어린 딸만이 그의 죽음을 지키고 있었다. 사후 <애니깽>이 개봉되었지만 유작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졸작이었고 그는 그렇게 잊혀진 배우가 되어 버렸다. 돌이켜 보니 너무나 아쉬운 영화 인생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